이 수막새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돌아온 수난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1934년 일본인 의사 다나카 도시노부(田中敏信)는 영묘사 터에서 출토된 얼굴무늬 수막새가 경주의 한 골동가게에 나와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출토되는 수막새의 문양은 대부분 연꽃이고 드물게 가릉빈가(迦陵頻伽)와 같은 새 무늬가 나올 때였다. 예사 유물이 아님을 직감한 다나카는 곧바로 골동가게를 찾았고, 100원(요즘 돈 200만 원 내외)에 수막새를 구입한다. 가끔 세간에 회자되던 이 수막새는 1944년 그가 본국으로 돌아갈 때 가져간 뒤 그 존재는 잊혀갔다.
하지만 환지본처(還至本處)하는 것이 수막새의 운명이었던지, 1964년 당시 박일훈 국립경주박물관장이 이 사실을 기억해냈고, 어렵게 다나카의 거처를 알아내게 된다. 그 후 여러 차례 편지를 보내고 주변 지인을 통한 설득 끝에 1972년 10월 다나카가 직접 이 수막새를 들고 박물관을 찾아와 기증함으로써 탄생지 서라벌로 돌아온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옛날에도 기와는 와범(瓦範)이라는 틀을 이용해 찍어 만들었다. 그와 달리 이 수막새는 손으로 빚은 것이어서 더 주목을 받았다. 아쉬운 점은 오른쪽 하단 일부가 떨어져나가고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마와 두 눈, 오똑한 코, 두 뺨과 턱선의 조화가 만들어내는 미소는 육감적이면서도 신비롭다. 두 팔이 떨어져나간 밀로의 비너스처럼, 일부가 깨져나가 오히려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끌림이 있다. 불완전함의 아름다움, 불완전함의 미학이다.
이야기는 영묘사에 관한 소략한 기록에서 시작된다. 선덕여왕 4년(635)에 완공된 영묘사와 관련하여 삼국유사는 “여러 기예에 두루 능통하여 신묘하기 이를 데 없는 양지(良志) 스님이 장륙삼존상과 천왕상, 전탑의 기와를 만들고 현판까지 썼다”고 했고, 삼국사기는 “개구리들이 영묘사의 옥문지(玉門池)에 모여들어 울어대자 왕(선덕여왕)이 그 울음소리를 듣고는 개구리 눈의 부라린 모습이 병사의 모습이라며, 왕성의 서쪽 여근곡(女根谷)에 백제군이 매복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라고 언급한 일화를 기록하고 있다. 영묘사가 선덕여왕과 관련 깊은 절임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어떤 이는 이들 기록에 의탁하여 수막새의 얼굴 주인공이 선덕여왕일 거라는 해석을 내놓는다. 더 나아가 그 신비로운 미소는 당시 최고의 조각가이자 영묘사 건립을 주관한 양지의 작품이라고 추단하기도 한다.
조금은 억지스럽다. 삼국유사에 양지가 고승이자 조각가이며 서예가인 걸출한 예술가임과 동시에 와공(瓦工)이었음을 기술하고 있으니 불사(佛事)를 후원한 선덕여왕의 얼굴을 수막새에 새겼을 개연성은 있다. 하지만 양지 작품이 확실한 경주 사천왕사지 출토 사천왕상 전(塼)돌 조각과는 터치나 느낌이 달라 선뜻 동의하기가 망설여진다.
나는 불사에 동원된 와공 누군가가 장기간 노역으로 쌓인 스트레스도 풀 겸 잠시 짬을 내어 연모하는 여인의 얼굴을 새겨본 것은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발굴된 것이 한 점뿐인 데다 직접 손으로 빚어 만들었다는 것도 그 가능성에 무게를 더한다. 아무튼 그런 다양한 상상과 스토리텔링이 더해질 때 차가운 유물은 온기가 돌고 살아 있는 생명체가 된다.
그 아득한 옛날, 사람들은 지붕을 덮는 기와 한 장에도 온 미감(美感)을 다해 장엄하는 예술정신이 있었다. 반세기 전만 하더라도 경주에는 돌보다 더 많은 것이 기와 파편이었다는데, 그 흔한 기와조각 하나도 허투루 보지 않고 그 속에서 신라 천년의 미소를 찾아내는 안목이 있었다. 그리고 또 세월이 흘러 나라가 나서 그 기와조각의 예술적 가치를 인정하고 보물로 지정하였으니, 그 각각의 시차는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