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내용은 여러 측면에서 흥미롭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초상화를 그려낸 이들의 전공이 미술이 아닌 경영학과 공학인 점이다. 미술과는 거리가 먼 과학자가 AI의 도움으로 화가가 된 셈인데, 아무튼 그들은 “19세기에 사진이 등장했을 때처럼 새로운 미술 분야가 탄생한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창작 영역을 개척했다”며 자신들의 작업에 미술적인 의미를 당당하게 부여하고 있다.
미술계의 반응은 사뭇 긍정적이다. 이들의 그림을 구입한 한 유명 컬렉터는 “역사적으로 훌륭한 초상화들을 기반으로 새로운 작품을 창조하는 프로그램 개발이 놀랍다”고 평가했다. 크리스티 관계자도 “현재는 AI로 그림을 그리는 프로그램이 드물고, 값비싼 기술의 영역에 있지만 앞으로는 널리 대중화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백 년 전, 정확히는 1917년 마르셀 뒤샹이 뉴욕의 그랜드센트럴 갤러리 전시에 출품하여 미술계를 충격에 빠트린 작품 ‘변기(샘)’ 사건에 비하면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AI의 미술적인 가능성 또는 그 재능(?)을 인정하는 분위기라고 해야 할까?
AI가 견인하고 있는 최근의 사회적인 변화는 경이롭다. 과거의 과학기술과는 차원이 다른 괴력을 발휘하며 곳곳에서 인간의 영역에 도전하고 있다. 알파고의 판단력은 가볍게 인간을 넘어섰고, 바야흐로 소설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 것이다.
본업이 경제학인 필자가 몇 년 전 학술지에 AI가 일자리, 산업, 경제 분야에 혁명적인 변화를 초래할 것이라는 논문을 발표한 적이 있지만, 이제는 AI가 인간의 감성을 담아내는 문학과 예술을 넘보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못해 두렵기까지 하다.
인간의 미술 활동도 끊임없는 진보를 계속해 왔다. 시대 상황에 따라 새로운 생각이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내고 새로운 개념이 새로운 사조를 이끌었다. 새로운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그 흔한 변기가 미술품이 될 수 있었고, 미술계의 돌연변이로 여겨졌던 팝아트, 비디오아트도 보편적인 장르가 된 지 오래다. 그처럼 지난 한 세기는 미술의 개념이 끊임없이 확장되고 경계와 장르가 해체되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그 과정을 AI의 미술 활동에 적용해 보면 그것에는 분명 새로운 미학적인 개념과 정체성이 담겨 있다. 빅데이터에 기반한 반복 학습으로 인지력이 생겨나고, 종전의 미(美)와는 구별되는 새로운 개념의 미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점에서 AI는 충분히 창조적이다. 존재하는 유(有)를 또 다른 유와 융합해 이전의 개별 요소들이 갖고 있지 않은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AI의 가능성은 무한대로 열려 있고, 그 앞날을 가늠하기 힘들다.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할 순기능이 클 것으로 기대하지만, 기존 질서를 해체하고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될지도 모른다. 그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미술이라고 해서 제외될 특별한 무엇이 있을까?
AI에 더 많은 인지력과 감성이 더해져 인간의 미감과는 차별적인 새로운 개념의 아름다움이 정의되고 창작될 때 그 아름다움은 어떤 아름다움일까? 인간이 추구해온 아름다움의 원형과 정체성의 확장일까, 아니면 해체 소멸일까?
세상을 바라보는 사춘기적인 호기심과 불안감이 뒤섞인 듯한 그런 궁금증이 강해질수록 나는 전통과 고전이, 그리고 오래된 아름다움이 그리워진다. 시간의 강 건너 저편에 있는 고문(古文)과 고미술의 숲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 아득한 시간 속에 인류가 추구해온 진리와 아름다움이 켜켜이 쌓여 있고 영혼이 숨 쉬고 있을 그곳, 그 피안의 세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