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겐 밤하늘의 별을 따다 두 손에 가득 안겨주고 싶은 조카 손주가 있다. 녀석의 이름은 규민. 규민이가 네 살 무렵이었을 거다. 사탕, 과자, 초콜릿 등 단것을 유난히 좋아했던 녀석을 위해 규민 엄마는 충치가 생길까 봐 종종 ‘단것 금지령’을 내리곤 했다. 그럴 때면 엄마 눈을 피해 이 할머니가 몰래 단것을 조달해주곤 했는데, 그날은 규민이에게 사각형 모양의 초콜릿을 주면서 “엄마에겐 비밀이야” 하고 귓속말을 했다. 순간 녀석이 목소리를 낮추면서 “할머니, 비밀이 네모나?” 묻는 바람에 눈을 마주치며 함께 웃었던 기억이 난다.
규민이가 난생처음 머리를 자르러 갔던 날도 손에 잡힐 듯하다. 돌도 채 지나지 않았을 무렵, 단골 미용실의 원장이 잘라준 머리카락이 바닥에 후두둑 떨어지자 녀석이 왕~ 울음보를 터뜨리는 것이 아닌가. 안쓰러운 마음에 원장한테 “제가 안고 있을 테니 계속 잘라 달라” 청했다. 온몸이 규민이 머리카락으로 범벅이 되었지만, 내 품 안에 폭 안겨 편안히 잠을 청하던 녀석을 보며 뿌듯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규민이와 함께했던 추억이 어디 한둘이랴만, 기껏 배낭에 태워 북한산에 올랐는데 산 중턱에서부터 쌕쌕 잠이 들어 엄마 아빠를 안타깝게 했던 녀석, 모유 수유를 했던 엄마가 양을 조절하지 못해 실컷 젖을 빨게 한 탓에 얼굴이 풀자루처럼 빵빵하게 부풀어 올랐던 녀석, 어린이집 공연 무대에서 아빠를 발견하곤 기분이 한껏 업 되어 제멋에 겨워 펄쩍펄쩍 뛰던 녀석, 공룡 이름을 줄줄 외우고 천자문 만화책을 즐겨 보았지만 정막 한글 깨치는 데는 애를 먹었던 녀석…. 그런 규민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날엔 할머니까지 감격에 겨워 했고, 6년 후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졸업장을 받고 단상에서 내려오던 날엔 눈가에 살짝 눈물이 맺히기도 했다.
규민이는 올해 고등학교 1학년이 되었다. 키 크는 것이 소원이던 규민이는 중3 때 훌쩍 자라 지금은 182cm가 되었다니 꿈을 이룬 셈이다. “키가 큰 만큼 마음도 커야 해.” 등을 두드려주니 수줍게 웃는 모습이 또한 일품이다. 엄마 마음 헤아릴 줄 아는 착한 심성에 무서움을 많이 타는 여린 감성의 규민이는 풍부한 상상력에 남다른 미적 감각을 지녔다. 한 가지 흠이라면 팔 다리가 조금 굼뜬 것이랄까. 그래도 이 할머니는 규민이만 보면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부르다.
한데 고1 규민이를 생각하면 여간 안쓰러운 게 아니다. 문이과(文理科) 통합이란 야심찬 기획하에 새롭게 만들어진 교과서로 공부하면서도, 정작 대학입시는 기존 방식 그대로 수능시험을 보고 수시와 정시를 치러야 하니 말이다. 아마도 규민이네 반 엄마들 마음은 너나없이 숯검뎅이가 되었을 것 같다.
그래도 엄마보다 조금 오래 산 할머니는 규민이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자신의 소중한 가치는 학교 성적에 따라 오르내리는 것이 아니라고, 인생은 길고 긴 마라톤이기에 지금 일희일비할 필요는 없다고, 대신 행여 넘어지더라도 툭툭 털고 다시 일어나 달릴 수 있는 힘을 갖추라고. 그리고 지금까지 듬뿍 받았던 사랑을 기억하며 자신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마음을 잃지 말라고. 8월에 태어난 우리 보물, 생일 축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