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경아의 라온 우리말터] 무더위·강더위 잡는 법

입력 2018-08-09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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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추가 지났다. 절기로는 가을로 들어섰건만 벌건 숯이 담긴 화로를 끌어안은 듯 뜨거운 나날이다. 폭염특보도 연일 발령되고 있다. 폭염주의보는 최고기온 33도, 폭염경보는 35도 이상이 이틀 넘게 지속될 때 내려진다. 지인의 말처럼 여름은 점점 더 비대해지고 가을은 더더욱 여위어만 간다. 뜬금없이 털북숭이 인간이 털을 포기한 건 정말 잘한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폭염에 털까지 있다면 어떨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영원한 청년’ 시인 윤동주는 여름날의 더위를 ‘끓는 태양’이라고 표현했다. “그 여름날 / 열정의 포플러는 / 오려는 창공의 푸른 젖가슴을 / 어루만지려 / 팔을 펼쳐 흔들거렸다 / 끓는 태양 그늘 좁다란 지점에서”로 시작되는 시 ‘창공’에서다. 태양은 그날처럼 오늘도 끓고 있으며, 내일도 계속 불탈 것이다. 뜨거운 날엔 햇볕을 피하고 미지근한 물을 자주 마시는 게 상책이다.

더위를 표현하는 우리말은 참 많다. 무더위, 가마솥더위, 찜통더위, 강더위, 불볕더위, 불더위…. 우리말만큼 섬세한 언어도 없을 듯싶다. 더위는 두 종류로 구분할 수 있다. 소나기 등으로 습도가 매우 높아, 찌는 듯 견디기 어려운 더위는 무더위, 찜통더위, 가마솥더위이다. 이 중 최악은 가마솥더위. 물이 펄펄 끓어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찬 가마솥을 상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조항범 충북대 교수에 따르면 ‘가마솥더위’는 1977년 8월 3일자 신문 기사에 처음 등장했다. 그날 대구 지역 수은주가 38.8도를 기록했는데, 이를 ‘살인적인 가마솥더위’라 표현했다.

무더위는 ‘물’과 ‘더위’가 어울린 말이다. ‘물더위’에서 ‘ㄹ’이 탈락해 ‘무더위’가 됐다. 무더위를 ‘무척 심한 더위’의 줄임말로 아는 이가 많은데, 무더위에 그런 뜻은 없다. 몹시 심한 더위는 ‘된더위’, 한창 심한 더위는 ‘한더위’이다. ‘찜통더위’는 찜통 안에 감자, 옥수수 등을 넣고 물을 끓일 때 나는 뜨거운 김을 쐬는 것처럼 몹시 뜨겁고 습한 더위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무더위보다는 찜통더위가 참기 더 힘들다.

습기가 많아 후텁지근한 날엔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른다. 밤엔 정말 견디기 어렵다. 잠을 제대로 못 자거나 자주 깨니 아침에 일어나도 온몸이 나른하고 피곤하다. 그런 날엔 평상심을 잃어 엉뚱한 짓을 할지도 몰라 정신줄을 꽉 잡고 지낸다(실은 그런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지 않으려고 더 조심한다).

오랫동안 비가 내리지 않고 볕만 뜨겁게 내리쬐는 ‘마른 더위’는 강더위이다. 여기서 ‘강-’은 한자어 강(强)이 아니라 순우리말이다. 겨울에 눈이 내리지 않고 바람도 불지 않으면서 매섭게 추운 ‘강추위’, 강서리(늦가을에 내리는 된서리), 강기침(마른기침) 등의 ‘강’도 모두 ‘물기 없이 마른’의 의미를 더한다. 강더위보다 정도가 더 심한 게 불더위, 불볕더위이다. 선풍기나 부채로는 떨칠 수 없는 더위이다.

한자어 폭염(暴炎), 폭서(暴暑)는 명함도 못 내밀 정도로 느낌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우리말 무더위, 가마솥더위, 찜통더위, 강더위, 불볕더위, 불더위, 된더위, 한더위는 모두 한 단어이므로 띄어 쓸 필요가 없다.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의 소설 ‘설국’을 다시 꺼내 들었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밤의 끝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첫 문장만 읽었는데도 더위가 저만치 물러난 듯하다. 연암 박지원이 강조한 ‘책읽기에 착심(着心)해 더위를 이기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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