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3부(주심 김재형 대법관)는 29일 삼성전자에서 근무했던 이모(33) 씨가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요양불승인처분 취소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패소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이 씨가 앓고 있는 '다발성 경화증'은 중추신경세포에 원인을 알 수 없는 다발적 손상이 생기는 희귀성 난치병이다. 우리나라 인구 10만 명당 3.5명에 불과한 수준으로, 발병원인 등이 의학적으로 규명되지 않은 상태다.
대법원은 이 씨의 경우 업무와 질병 사이에 '상당한 인과관계를 인정할 여지가 상당하다'고 보고 사건을 다시 심리하라고 주문했다.
△이 씨가 우리나라 평균 발병연령 38세보다 훨씬 이른 시점에 발병한 점 △유기용제 노출, 주·야간 교대근무, 업무상 스트레스, 햇빛 노출 부족에 따른 비타민D 결핍 등 다발성 경화증 촉발 요인이 다수 중첩될 경우 발병 또는 악화에 복합적으로 기여할 가능성 △사업주와 관련 행정청이 해당 공정에서 취급하는 유해화학물질 등에 관한 정보가 영업비밀이라는 이유로 공개 거부해 노출 정도를 증명하기 곤란한 사정 등이 고려됐다.
유해화학 물질에 노출되는 직업병의 경우 '상당 인과관계'를 입증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근로자가 입증책임을 지는데 의학적, 과학적 증명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대법원은 2004년 판결에서 근로자의 취업당시 건강상태, 작업장의 유해요인 유무, 작업장에서 근무한 기간 등을 고려해 사회통념에 따른 합리적인 추론으로 인과관계를 인정할 수 있다고 입증책임을 완화한 바 있다.
하지만 재판 실무에서는 작업환경의 개별 유해 요인을 살피면서 '상당 인과관계'를 엄격하게 적용해왔다. 이번 사건에서도 이 씨는 1, 2심에서 연이어 패소했다. 당시 재판부는 "이 씨가 교대 근무, 초과 근무 등으로 다소 많은 양의 업무를 담당하기도 한 사실이 인정되기는 한다"면서도 "통상적인 근로자가 감내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 생리적 변화를 초래할 수 있을 정도의 만성적인 과로나 스트레스에 이르렀다고 인정하기에 부족하다"고 밝혔다.
대법원 관계자는 "그간 업무와 질병 사이의 상당인과관계를 인정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한 경우가 많았다"며 "(이번 대법원 판결은) 사업주의 협조 거부 또는 관련 행정청의 조사 거부나 지연 등으로 작업환경 유해요소를 구체적으로 특정할 수 없었던 사정이 인정되면 근로자에게 유리한 간접사실로 고려해야 한다는 지침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 씨는 2002년 11월 삼성전자 천안 LCD공장에 입사해 2007년 2월 퇴사할 때까지 LCD 패널의 화질을 검사하는 업무를 담당했다. 이 씨는 재직 중 다발성 경화증이 발병했고, 정확한 진단을 받지 못하다가 퇴사 후 확진을 받았다. 이 씨는 근로복지공단으로부터 산재가 인정되지 않자, 2011년 2월 소송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