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으로 상황이 불안할 때 불굴의 피난처는 미국 달러였다. 하지만 미국 대통령이 도널드 트럼프인 이상, 이 불문율은 이미 깨진 것으로 보인다.
북한을 길들이겠다고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에 ‘화염과 분노(fire and fury)’같은 초강경 발언을 연일 쏟아내면서 세계의 투자자들은 달러를 팔아치우고 있다. 앞서 사우디아라비아 등 아랍 국가들이 카타르와 단교를 선언해 석유가 풍부한 페르시아만에 치명적인 위기를 자아낸 6월에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었다. 이뿐인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755명의 미국 외교관을 추방해 두 강대국 간 긴장을 고조시킨 7월에도 달러 가치는 곤두박질쳤다. 올들어 지금까지 달러는 주요 통화 바스켓에 대해 거의 8%가 빠졌다.
뉴욕타임스(NYT)는 세계 무역에서 달러는 기축통화로서 절대 지배적인 위치에 있지만 달러 종주국인 미국 대통령이 그에 걸맞지 않는 언행을 일삼으면서 달러가 기존의 지위를 잃을 수도 있는 징후들이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한다. 트럼프 대통령의 돌발 행동들이 외교관계의 규범에서 도를 넘어서며 불확실성을 키우고 있다는 것이다.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만 해도 많은 투자자들이 트럼프의 감세, 규제 완화, 인프라 투자로 경제 성장이 촉진될 것이란 기대감에 젖었었고, 이는 주식시장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시장의 기대는 트럼프의 난기류에 압도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러시아의 작년 대선 개입 의혹과 트럼프 측근들의 연이은 연루 의혹은 시원하게 해결되지 않고 있다. 또한 트위터를 통해 쏟아내는 충동적인 발언들은 혼란을 가중시키고 때로는 각료들의 위신을 떨어트리기도 한다. 대부분의 이코노미스트들은 달러 가치의 추락은 트럼프 행정부가 핵심 목표를 달성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가정을 반영한다고 평가한다.
달러 가치가 곤두박질치는 동안 주요 통화 바스켓 국가에는 서광이 비치고 있다. 유럽 재정위기에 일조했던 스페인은 최근 경기가 위기 이전 수준을 회복했고, 고질적인 유럽병을 앓던 프랑스는 에마뉘엘 마크롱이라는 새로운 대통령을 선출하면서 개혁의 와중에 있다. 심지어 국제통화기금(IMF) 등에서 구제 금융을 지원받았던 그리스도 경제가 개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투자자들이 달러를 팔고 유로를 사는 건 당연한 움직임이다. 올들어 달러는 유로 대비 11% 이상 하락했다.
문제는 달러가 경제에 적신호가 켜진 나라의 통화에 대해서도 약세라는 것이다. 달러는 엔에 대해 올들어 6% 이상 빠졌다. 현재 일본은 아베 신조 총리의 학원 스캔들로 경제에 빨간불이 켜진 상태다. 심지어 달러는 유럽연합(EU) 탈퇴를 결정한 영국 파운드에 대해서도 맥을 못춘다. 작년 6월 브렉시트 결정 이후 파운드화 가치가 폭락하면서 수입 가격을 끌어올렸고 이는 소비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파운드는 영국이 EU와 이혼 절차를 진행 중임에도 달러에 대해 7% 이상 상승했다.
달러 약세가 반드시 나쁜 것 만은 아니다. 미국에 본사를 둔 다국적 기업의 금고를 더 채워주고, 미국에서 보내는 이들의 휴가 비용 부담을 덜어준다. 현지 소비 진작으로도 연결된다.
하지만 미국은 수출보다 수입이 더 많은 나라다. 이를 감안할 때 달러 약세는 의류에서 전자제품에 이르기까지 미국 소비자들이 필요로 하는 제품 가격을 높인다. 트럼프에게 달러 약세가 반가울 수 있지만 미국 소비자들에겐 그렇지 않은 것이다.
달러 약세가 진짜 미국 행정부의 계획의 일부라면, 여기에도 모순은 존재한다. 다른 요소들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기 때문. 올들어 달러는 중국 위안화에 대해 거의 4% 하락했다. 그럼에도 트럼프 행정부는 불공정 무역 관행을 개선한다는 명분으로 중국에 보복을 예고한 상태다.
NYT는 현재 달러의 운명은 시장에 예기치 못한 실망을 안겨준 트럼프 행정부에 좌우된다고 지적한다. 피터슨연구소의 포젠 연구원은 “미국은 과거에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위험한 상태에 있다”며 달러 투자에 경종을 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