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길(安吉)의 처는 통일신라시대 여성으로 성씨도 이름도 남아 있지 않다. 남편의 이름은 안길이지만 안길의 처라고 부르는 것도 정확한 것은 아니다. 안길에게는 여러 명의 처첩(妻妾)이 있었고 그중 한 명에 불과하다. 엄격하게 처(妻)였는지 첩(妾)이었는지도 정확하지 않다.
남편인 안길은 무진주(武珍州·오늘날 광주(光州) 일대)의 관리였다. 어느 날 무진주에 스님 옷을 입고 손에 비파를 든 거사(居士) 한 사람이 와서 마을 이곳저곳을 살피고 다녔다. 안길은 그가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고 생각해서 자기 집으로 초대했다. 정성껏 대접한 다음 밤이 되자 안길은 처첩 세 사람을 불러, “오늘 밤에 거사 손님을 모시고 자는 사람은 종신토록 해로(偕老)를 하겠다”라고 했다.
안길의 말을 듣고 두 처는, “차라리 함께 살지 못할지언정, 어떻게 딴 사람과 함께 잠자리를 하겠습니까?”라며 거절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 처는 남편이 종신토록 함께 살겠다고만 한다면 명을 따르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날 밤 남편의 뜻을 따라 손님의 잠자리 시중을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손님은 떠나면서 서울(경주)에 오게 되면 꼭 자신을 찾아오라고 하였다.
거사 차림의 이 손님은 문무왕(文武王)의 서제(庶弟)인 거득공(車得公)이었다. 문무왕이 재상(宰相)으로 임명하려 하자 먼저 지방의 사정을 살펴본 다음 취임하겠다며 지방을 시찰하고 있던 것이었다. 훗날 안길은 서울에 갈 일이 생기자 거득공을 찾았다. 안길이 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거득공은 달려 나와 손을 잡고 궁중으로 데리고 들어가 자신의 부인을 불러내어 잔치를 베풀었다고 한다.
또한 문무왕에게 아뢰어 성부산(星浮山) 아래 지역을 무진주 상수리(上守吏)인 안길의 소목전(燒木田·궁중과 여러 관청에 공출하는 연료 밭)으로 삼아 벌채를 금지하고 사람들이 가까이 하지 못하게 했다고 하여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였다고 한다. 이 산 아래에는 밭 30묘(畝)가 있어 종자 세 섬을 뿌리는데 이 밭이 풍작이면 무진주도 풍작이 되고, 흉년이면 무진주도 역시 흉년이 들었다고 한다.
아내에게 집에 찾아온 손님의 잠자리 시중을 들게 하는 대처제(貸妻制)는 오늘날 관념에서는 이상해 보이지만 고대에는 적지 않은 지역에서 행해졌으며 오늘날에도 일부 행해지고 있다. 안길의 처 이야기는 우리나라에도 이러한 풍습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안길의 제안을 거절한 두 처(妻)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통일신라시대에는 이미 일반적인 풍습은 아니었다.
그런데 다른 한 명은 왜 안길의 제안을 받아들였을까? 남편의 출세를 돕고자 하는 마음에서였을까? 어쩌면 그 여성은 두 처와는 처지가 달라 남편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이유는 알 길이 없지만, 통일신라시대에 남편과 종신토록 함께 살기 위해서 손님의 잠자리 시중을 들어야 했던 이름도 남기지 못한 한 여성이 있었던 것이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