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는 1231년 몽골이 침입해 오자 이듬해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고 이후 40여 년간 항전하였다. 유례없이 긴 전쟁으로 국토는 황폐화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포로로 끌려갔다. 오랜 전쟁에 지친 양국은 화의를 맺고, 1270년 마침내 고려는 개경으로 환도하였다. 그러나 삼별초는 개경으로 오라는 왕의 명령을 거부하고 항전을 시작하였다. 이 와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여성들의 피해 역시 적지 않았다.
현문혁(玄文弈)의 처(생몰년 미상)는 역사서에 성씨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현문혁은 1270년 당시 장군이었는데, 삼별초가 강화도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탈출을 도모하였다. 배 1척에 의지하여 가족과 함께 개경으로 향하였는데, 적선 4~5척이 추격해 왔다. 현문혁은 활을 쏘며 저항하였다. 혼자서 활을 쏘는데도 화살이 끊이지 않고 나갈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처가 곁에서 화살을 뽑아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배가 얕은 여울에 얹히자 추격군이 접근하였다. 화살이 현문혁의 팔에 명중되니, 현문혁이 배 안에 쓰러졌다. 그러자 현문혁의 처가 “나는 쥐새끼 같은 놈들에게 욕을 당할 수 없다”며 두 딸을 품에 안고 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삼별초군은 현문혁을 사로잡았지만 그의 용맹을 아끼어 죽이지 않았다. 얼마 뒤 현문혁은 다시 강화를 탈출해 개경으로 돌아왔다. 현문혁은 이후 1290년 합단(哈丹)이 침입했을 때도 격퇴하는 데 공을 세웠다. 1272년 원종은 현문혁의 처가 역적들에게 절조를 더럽히지 않았다며 외명부(外命婦) 벼슬을 한 등급 높여 추봉하고, 자손들에게도 관직을 주었다.
삼별초는 애초에 최충헌의 아들 최우가 자신의 호위를 위해 만든 사병 조직으로 국가의 군대라기보다는 최씨 정권의 사병적 성격이 강했다. 몽골과 화의를 하고 개경으로 환도하고자 한 것은 왕실이었지 무인 집정들이 아니었다. 이에 삼별초가 환도 결정을 거부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었을 것이다.
이들이 강화에서 진도로, 다시 제주로 근거지를 바꿔가며 저항하는 동안 여성들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조정 관리의 처들 중 많은 수가 이들에게 붙잡혀 가니 관리들은 재혼을 하였다. 반란이 진압된 뒤 관리의 처들 중 돌아온 사람들도 있었지만 많은 이들이 이혼 당하였다. 조선 후기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잡혀갔다 돌아온 여성들을 ‘환향녀(還鄕女·화냥년)’라며 멸시했던 것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전쟁 시 여성의 수난은 시공을 초월한다 할 수 있다.
현문혁의 처는 ‘고려사’ 열녀전에 등재되었다. 그녀가 목숨을 버려 저항한 것은 단지 남편에 대한 신의, 겁탈에 대한 저항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무인집정에게 농락당하던 왕실의 수호가 의(義)라는 생각 역시 없지 않았을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건 의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 점에서 그녀는 만인의 귀감이 될 만한 여성이었다 하겠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