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금융거래 사고 원인의 입증책임을 금융회사에게 부담시키는 방안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전문성 부족과 정보 비대칭성 문제로 금융소비자들이 합당한 배상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지언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9일 보고서에서 “전자금융거래법은 전자금융거래 사고 피해 구제를 위해 정책적 차원에서 금융회사에게 무과실 손해배상책임을 부과하고 있으나, 제도 취지에도 불구하고 피해자가 배상을 받는 데 장애요인이 많다”며 이 같이 강조했다.
무과실책임 제도는 특정 금융회사가 관리ㆍ운영하는 전자금융거래시스템에서 사고가 발생할 경우 금융회사가 과실이 없어도 정책적 관점에서 배상토록 한 제도다. 그러나 최근 소비자들이 배상을 받는 데 따른 제약이 과도해 실효성 논란이 일었다.
이 연구원은 피해자 구제가 어려운 최대 이유로 사고 원인을 피해자가 기술적으로 입증해야 한다는 점을 꼽았다. 정보통신기술 전문성과 정보 비대칭성 문제로 인해 소비자가 사고 원인과 손해 간 인과관계를 규명하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는 설명이다.
그는 “향후 전자금융거래법 개정 시 전자금융거래 사고 원인의 입증책임을 금융회사에 부담시키는 방안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해당 사고가 금융회사의 통제 밖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을 소비자가 아닌 금융회사가 입증해야 한다는 얘기다.
이와 함께 현행법이 무과실 손해배상책임이 인정되는 사고ㆍ범죄 유형을 제한적으로 열거하고 있다는 제도적 한계도 꼬집었다. 가령 접근매체(means of access to the account) 위ㆍ변조 사례의 경우, 접근매체 유형을 제한하고 범죄 유형도 위ㆍ변조로 한정해 관련 논란이 빈발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법적 분쟁의 핵심인 접근매체는 전자금융거래 지시 주체와 내용의 진실성을 확인할 수 있는 수단이다. 우리나라는 미국과 다르게 스마트카드, 인증서, 전자서명생성정보, 생체정보만 접근매체로 열거하고 있다. 계좌번호, 계좌비밀번호, 이체비밀번호, 보안카드, 일회용비밀번호는 포함하지 않고 있어 법적 시비의 단초가 된다.
이 연구원은 “정보통신기술 발달과 함께 접근매체도 다양해지고 있고 전자금융사기도 지능화, 정교화되고 있어 새 매체와 사기 수법에 대한 법류 분쟁에서 소비자가 구조적으로 불리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따라서 접근매체 유형을 특정하거나 범죄 유형을 한정짓지 말고 포괄적으로 재정의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다. 미국처럼 접근매체를 이용자의 계정에 접근, 접속하는 데 필요한 일체 수단으로 정의해야 한다는 것. 범죄유형도 특정 유형을 거론하기보다 범주를 넓혀 피싱이나 스미싱에 대한 피해까지 구제해야 한다는 얘기다.
다만, 법 개정 과정에서 금융회사의 무과실책임을 과도하게 높였을 경우의 폐해도 함께 언급했다. 이 연구원은 “과도하게 (무과실책임을) 높이면 이용자의 사기 공모 등이 빈발할 우려도 있다”며 “금융회사가 사고의심 거래나 의심스러운 계좌를 일정 시간 지연하거나 조사하도록 하는 방안도 강구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