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원전 자회사의 대규모 손실로 경영 위기에 처한 일본 도시바가 추진 중인 반도체 사업 매각이 계속 꼬이고 있다. 원래 우선협상대상자는 15일께 결정할 예정이었으나 협력관계에 있는 미국 웨스턴디지털(WD)이 국제중재재판소에 이어 이날 미국 고등법원에 매각 금지 요청서를 제출하면서 매각 자체에 대한 회의론마저 고조되고 있다.
일본 언론들에 따르면 WD는 15일(현지시간) 미국 샌프란시스코 캘리포니아 고등법원에 도시바가 추진 중인 반도체 자회사 ‘도시바메모리’ 매각 금지 요청서를 제출했다. WD는 도시바와 일본 욧카이치공장에서 NAND 플래시 메모리를 공동 생산하고 있는 파트너로, 도시바메모리 매각에서 독점 협상권을 요구하며 지난달에는 국제중재재판소에도 중재를 신청하는 등 도시바와의 관계는 갈데까지 간 상태다. 중재 결과에 따라선 매각이 무산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만큼 도시바 입장에서는 WD와의 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하는 게 최선인 상황이다.
하지만 WD는 양사의 협력관계를 빌미로 억지를 부리고 있다. 도시바메모리 인수액으로 1조9000억 엔을 제시했는데 이는 다른 진영이 제시한 금액보다 훨씬 낮은 액수다. 그러면서 WD는 미국 펀드와 일본 정부계 펀드인 산업혁신기구, 일본정책투자은행으로 구성된 미·일 연합에 합류하는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어차피 일본 정부와 도시바가 중국 기업이 포함된 진영에는 도시바메모리를 팔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미·일 연합 쪽에 합류하는 게 유리하다는 판단인 것으로 보인다.
스티브 밀리건 WD 최고경영자(CEO)는 이날 미국 고등법원에 도시바메모리 매각 금지 요청서를 제출한 데 대해 “도시바가 WD의 계약상 권리를 이해하지 않고 있어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해명했다. 업계에서는 한때 밀리건 CEO와 쓰나가와 사토시 도시바 사장이 여러 차례 회동하면서 WD가 양보해 양사가 완만하게 합의할 것이란 낙관론도 있었다. 하지만 우선협상대상자 선정을 코앞에 두고 다시 이의를 제기하자 도시바는 물론 금융업계에서도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분위기다. 심지어 일각에서는 도시바메모리 매각 자체가 없었던 일이 되는 것 아니냐는 회의론도 커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국제중재재판소에서 판정이 나오려면 약 1년이 걸리기 때문에 WD가 시간끌기 꼼수를 부리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사실, WD가 도시바메모리에 이처럼 집착하는데에는 나름의 처절한 이유가 있다. WD는 데이터센터의 핵심 부품인 하드디스크구동장치(HDD)에서 세계 1위다. 그러나 이 분야는 사양길이나 다름없다.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플래시 메모리로 사업의 축을 옮기지 않으면 성장은 멈추고 만다. 플래시 메모리에서 도시바와 협력하는 미국 샌디스크를 작년에 170억 달러에 인수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거액을 들인 사업이 경쟁사에 넘어가 합작사업이 불안정해지는 상황은 아무래도 피하고 싶은 것이다.
또한 도시바메모리의 욧카이치공장은 생산능력이 안정적이기도 하지만 지적재산권도 막대하다. NAND 플래시 메모리는 도시바가 1987년에 발명, 삼성전자에 기술 사양을 공개하면서 시장을 형성해왔다. 초기 특허기한이 만료됐지만 사업을 오래해온 덕분에 회로구조와 전하축적 방법 등 폭넓은 분야에서 방대한 특허를 갖고 있다. WD가 도시바메모리 인수에 성공하면 이런 대규모 특허를 손에 넣는 것은 물론 소액 투자로도 기술이 외부로 유출될 우려를 덜 수 있다.
현재 유력한 우선협상대상자는 미국 반도체기업인 브로드컴이 꼽힌다. 브로드컴은 도시바와 제품이 별로 겹치지 않아 독점금지법 상의 걸림돌이 적고, 제시한 인수액도 2조2000억 엔으로 도시바의 목표액에도 부합한다. 그러나 브로드컴도 완벽한 매각 상대는 아니다. 브로드컴은 싱가포르 반도체회사인 아바고테크놀로지 산하에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기술 유출은 물론 욧카이치공장의 대규모 감원도 배제할 수 없다. 일본 경제산업성은 당초 도시바메모리의 매각 조건으로 기술유출 방지와 욧카이치 공장의 고용유지를 내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