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그의 이런 고질병들을 더 이상은 멋모르는 정치인의 호기로 봐 줄 수만은 없을 것 같다. 현재 미국 정국을 뒤흔들고 있는 ‘러시아 게이트’ 파문이 어디까지 미칠지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우리나라에도 불똥이 어떻게 튈지 모를 일이다. 이 ‘천둥벌거숭이’ 같은 ‘방 안의 코끼리’를 어떻게든 손봐 줄 때가 온 것은 아닐까.
‘코끼리 길들이기’라고 하면 인지언어학의 세계적인 권위자 조지 레이코프 UC버클리대 교수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2004년 미국 대선을 앞두고, ‘민주당은 왜 늘 공화당에 질까’라는 의문을 던졌다. 그에 대한 결론은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였다. 레이코프는 공화당을 상징하는 동물인 코끼리를 비꼬면서 보수 진영이 선점한 프레임을 무너트릴 수 있는 대안을 제시했다. 즉, 보수 진영이 내놓는 프레임을 공격하지 말고, 아예 그 프레임을 재구성하라는 것이다. 민주당은 공화당을 이기고 싶어서 늘 안달하면서도 정작 자기네 당을 상징하는 ‘당나귀’보다는 공화당을 상징하는 ‘코끼리’를 생각하다 보니 자꾸 코끼리를 욕함으로써 유권자들로 하여금 공화당에 대한 각인만 더 시키게 된다는 것이다.
제임스 코미 전 미국 연방수사국(FBI) 국장의 8일 청문회는 프레임 싸움에서 실패한 대표적인 사례로 꼽을 수 있다. 코미는 10년 임기 중 절반 이상을 남겨 둔 상황에서 지난달 9일 갑작스럽게 해고 통보를 받았다. 3월부터 시작한 러시아의 미국 대선 개입 의혹 및 트럼프 캠프와 러시아 당국 간의 내통 의혹 수사 확대에 대한 응징이라는 설이 나돌았다. 트럼프는 자질 미달을 해임 이유로 들었다.
이에 대한 코미의 반격은 미숙하기 짝이 없어 보였다. 8일 상원 정보위원회 증언대에 선 코미는 “올 1월 트럼프가 단둘이 있을 때 충성 맹세를 요구했다”는 것과 “트럼프가 임기보장을 빌미로 무엇인가를 요구하려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폭로했다. 그러면서 “트럼프의 의도가 미심쩍어 대화 내용을 메모해 뒀다가 친구를 통해 언론에 흘렸다”고 했다. 하지만 서면에 이은 육성 증언에서도 트럼프의 러시아 내통을 입증할 만한 물증, 즉 스모킹 건(smoking gun·결정적 증거)은 없었다. 트럼프의 사법 방해를 입증하려면 적어도 트럼프가 러시아 게이트에 연루된 마이클 플린 전 국가안보보좌관에 대한 수사 중단 압력을 노골적으로 했다는 증언이 있었어야 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청문회 후 코미에 대한 동정론이 불신론으로 뒤바뀌었다. 여기에는 코미의 전적도 무시할 수 없다. 그는 원래 공화당 지지자였으면서도 민주당 정권에서 제안한 FBI 수장 자리를 수락할 만큼 정치적인 인물이다. 작년에는 대선을 11일 남겨 두고 당선이 유력시됐던 민주당 후보 힐러리 클린턴의 이메일 스캔들을 다시 들쑤셔 판세를 뒤엎고, 공화당 후보였던 트럼프 당선의 일등 공신이 됐다. 또한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과는 재임 8년간 겨우 두 번 만났으면서, 트럼프와는 4개월여 동안 세 차례나 독대를 하고 여섯 번이나 전화통화를 한 점도 석연치 않다.
어쨌든 코미의 증언은 자신이 해임된 데 대한 분풀이로, 트럼프의 권력 남용을 폭로하려다 자신이 놓은 덫에 걸린 꼴이 됐다. 미국 37대 대통령 리처드 닉슨의 “나는 사기꾼이 아니다”라는 말이 되레 “닉슨 = 사기꾼”이라는 각인을 시킨 것처럼, 코미 역시 자신을 ‘쇼보트(showboat·과시꾼)’라고 몰아간 트럼프의 프레임에 휘말려 ‘쇼보트’가 되고 만 것이다.
트럼프는 뛰어난 사업가로서 이미 자신만의 프레임이 확고한 사람이다. 상대방을 자유자재로 요리할 수 있는 수완가에게 맞불을 놓는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레이코프 교수는 프레임 싸움에서 밀리지 않으려면 우선 상대를 인정하라고 조언한다. 그러고 나서 프레임을 재구성하고, 상대의 말로 반박하지 말고 자신의 신념대로 말하라고.
‘코끼리 길들이기’는 의외로 쉬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