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원의 세상풍경] 기휘(忌諱)에 대하여

입력 2017-02-17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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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우리나라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 임금이나 집안 어른들의 이름을 입에 올리거나 또는 그 이름을 따서 작명하는 것을 삼갔다. 이것을 ‘기휘(忌諱)’ 또는 ‘피휘(避諱)’라고 한다. 여기서 ‘휘’는 피한다는 뜻으로 두렵고 무서워서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존경의 뜻을 담아 피하는 것이었다.

사람의 이름과 몸은 운명을 같이하므로 이름이 다치면 그 사람의 운명이 상하게 되고, 이름이 욕되게 불리면 그 사람의 인격 역시 욕된다고 여겼다. 그래서 임금이나 집안 조상의 이름이 남에게 함부로 불리어 해를 입거나 다칠까봐 일부러 본명을 숨겨두었다.

역사적으로는 중국 진나라 진시황에게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본명인 정(政)자를 피해 당시 모든 인명과 관리명에 그 글자를 쓰지 못하게 하고, 심지어 정(政)자 속에 들어 있는 ‘정(正)’자도 쓰지 못하게 하여 정월(正月)이라는 말조차 단월(端月)이라 부르게 했다.

황제나 왕에게만 적용하던 기휘는 나중에 공자와 같은 성현과 집안의 웃어른 등으로 확대되었다. ‘사기’를 쓴 사마천의 아버지 이름은 담(談)이다. 그래서 바른 사실로 역사를 기록하는 그조차도 자신이 편찬한 사기에 장맹담(張孟談)을 장맹동(張孟同)으로, 조담(趙談)을 조동(趙同)으로 이름을 바꾸어 놓았다.

우리나라 대구의 지명이 대구(大丘)에서 대구(大邱)로 바뀐 것도 먼저 쓰던 언덕 구(丘)자가 공자의 이름이기 때문에, 성현의 이름을 지명으로 감히 쓸 수 없다고 해서 땅이름 구(邱)자로 고친 것이었다.

임금의 이름들이 하나같이 어렵고 잘 쓰지 않는 글자를 쓰는 것도 기휘 풍습 때문이었다. 그래야 그걸 일상생활에서 피해 쓰더라도 불편하지 않아서다. 당장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선비가 글을 읽을 때 최소한 5대 조상까지의 이름자가 글에 나오면 그 글자는 소리 내어 읽지 않고 묵음으로 넘어갔다.

필자가 어릴 때 할아버지는 강릉 옆에 있는 주문진을 주문진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증조할아버지의 호가 ‘주문’이어서다. 주문진을 주문진이라고 무심히 부르는 말 속에 자기도 모르게 부친의 호를 입에 담게 되기 때문이었다. 그런 할아버지 때문에 우리 집에서는 주문진을 주문진이라고 부르지 않고 ‘새말’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요즘 새말에 오징어가 많이 난다더라, 그런 식으로 말했다.

필자의 부친 역시 여러 공구 중에 다들 일본 발음으로 ‘몽끼’라고 부르는 멍키 스패너를 ‘몽끼’라고 부르지 않았다. 가까운 집안 어른 중 한 분의 성함이 ‘몽’자와 ‘기’자를 썼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들 ‘몽끼’라고 부르는, 여러 공구 가운데서도 귀족처럼 은색으로 하얗게 빛나는 그 공구를 아버지는 “거 왜 나사를 돌리면 입이 벌어졌다 좁아졌다 하는 연장이 있지 않으냐? 그걸 내오너라”라고 말씀하셨다.

아주 옛날이야기 같고 일부 집안의 이야기 같지만 이런 기휘 풍습은 현재까지도 내려오고 지금도 우리 일상생활 속에 그대로 남아 있다. 누가 집안 어른의 함자를 물을 때 “이 석린 씨입니다” 하지 않고, “주석 석자에 기린 린자를 씁니다” 하고 말하는 것도 기휘 풍습 때문이다.

이젠 예전처럼 철저하게 지키지 않지만, 주문진에 사는 후배의 전화를 받고 문득 옛시절의 일이 떠올라 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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