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이 삼성 이재용(49) 부회장을 구속하면서도 박상진(64) 사장에 대한 영장을 기각한 것은 사실상 뇌물공여 범죄를 주도한 게 이 부회장이라는 판단으로 받아들여진다. 통상 재벌 총수 비리 수사에서 나오던 '총수는 몰랐고 임원진이 알아서 했다'는 논리가 통하지 않은 셈이다.
서울중앙지법 한정석 영장전담판사는 17일 이 부회장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하면서 박 사장에 대해서는 "지위와 권한 범위, 실질적 역할 등에 비춰볼 때 구속의 사유와 필요성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박 사장은 정유라(21) 씨에 대한 승마지원은 물론 최순실(61) 씨 측에 자금을 지원하는 실무를 책임졌던 인물이다. 당초 법조계 안팎에서는 이 부회장보다 박 사장이 구속될 가능성이 더 높다는 관측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법원은 의사결정구조 정점에 있는 이 부회장을 주목했다. "새롭게 구성된 범죄혐의 사실과 추가로 수집된 증거자료 등을 종합할 때 구속 필요성이 인정된다"는 게 법원의 설명이다. 뇌물공여와 횡령, 재산국외도피 등의 혐의가 적용된 구속영장 발부로 그동안 대기업이 펼친 '기업은 강요죄 피해자'라는 주장도 더 이상 유지되기 어려울 전망이다.
통상 검찰이 대기업을 수사할 때 총수의 의사결정 관여를 입증하는 데 가장 큰 어려움을 겪는다. 의사결정 구조상 구두지시가 많고, 다른 정황 증거를 확보하기가 어렵다. 임원급 실무진 선에서 대신 책임을 떠안고 입을 열지 않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법원은 이번 결정을 통해 '지위'와 '권한범위'를 언급하며 사실상 이번 범행을 주도한 게 이 부회장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특검이 그동안 삼성에 집중하기 위해 수사를 미룬 롯데와 SK, 포스코 등 다른 대기업들이 주목할 대목이다.
박영수 특별검사팀은 이 부회장에 대한 구속영장이 한 차례 기각된 이후 3주 간의 보강 수사를 통해 삼성의 청탁과 거래 대가성을 입증하는 데 주력했다. 특히 특검이 추가로 확보한 안종범(58) 청와대 전 정책조정수석의 업무수첩 39권이 핵심 증거로 작용했다. 특검은 공정거래위원회와 금융위원회 압수수색을 통해 이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작업 전반에 이뤄진 특혜 정황을 포착했다. 정 씨의 말을 스웨덴 명마인 '블라디미르'로 바꿔주는 과정에서 삼성 자금이 국외로 빼돌려진 사실도 확인했다. 특검은 이를 토대로 뇌물 공여와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횡령·재산 국외도피, 범죄수익 은닉의 규제 및 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 국회에서의 증언·감정 등에 관한 법률 위반(위증) 등 5가지 혐의를 적용했다.
이 부회장은 2015년 자신의 경영권 승계작업을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해 최순실(61) 씨 일가 지원을 통해 정부 기관에 청탁한 혐의를 받고 있다. 삼성은 미르와 K스포츠재단에 204억 원의 출연금을 냈고, 최 씨 조카 장시호(38) 씨가 실질적으로 운영한 한국동계스포츠영재센터에 16억 원을 지원했다. 최 씨 모녀의 독일회사인 코레스포츠와는 220억 원대 컨설팅 계약을 체결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