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경아의 라온 우리말터] 노가리, 까지 말고 씹으세요

입력 2016-07-19 10:27 수정 2016-07-19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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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없이 2016년의 반이 지나갔다. 여름 휴가 중인 선배의 부름(사실은 엄명!)을 받아 몇몇 동기들과 을지로 노가리 골목을 찾았다. 플라스틱 파란색 탁자와 빨간색 의자, 생맥주 잔을 부딪치며 즐거워하는 사람들…. 20여 년 전 모습과 별반 달라진 게 없다. 장충동 족발, 동대문 연탄 생선구이, 신림동 순대 등 먹자 골목이 서울에도 여러 군데 있지만 한여름엔 노가리 골목이 각별하다. 막힐 듯 이어지는 빛바랜 골목마다 서민의 과거와 오늘이 어우러져 한잔 술에 사람 사는 향기가 나기 때문이다.

“사장님, 여기 호프 세 잔 더요!” 이곳에선 많은 사람들이 생맥주를 ‘호프’라 말한다. 마당이 있는 건물, 궁전, 농장 등을 뜻하는 독일어가 호프(hof)다. 광장에서 맥주 마시기를 즐기는 독일의 문화가 우리쪽으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생맥주가 호프로 와전된 것이다. 어디 이뿐인가. 맥줏집 또한 호프로 불린다. 국립국어원은 언중의 입길에 자주 오르내린다는 이유로 호프를 ‘독일어 hof’라고 명시하면서 “한 잔씩 담아 파는 생맥주. 또는 그 생맥주를 파는 맥줏집”이란 의미의 표준어로 인정했다. 이제 나도 생맥주, 맥줏집을 호프로 받아들여야 할까?

“야, 노가리!” 하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참 오랜만에 듣는 별명이다. 성(姓) 때문에 붙은 별명이지만 만족스럽다. ‘국민 생선’ 명태의 새끼가 노가리 아니던가. 그러고 보니 명태만큼 다양한 이름을 가진 물고기도 없다. 가공법, 요리법 등에 따라 이름이 달라 우리말을 풍성하게 하는 데도 한몫 톡톡히 한 귀한(?) 물고기다. 갓 잡아 싱싱한 명태는 생태다. 말린 명태는 건조 정도에 따라 북어, 노가리, 코다리로 불린다. 바싹 말린 것은 북어, 반쯤 말린 것이 코다리다. 코다리는 명태의 내장을 빼고 코를 꿰어 말린다고 해서 얻은 이름이다. 노가리는 명태의 새끼를 바싹 말린 것이다. 또 명태는 얼리기도 하는데, 겨울에 잡자마자 얼린 것이 동태다. 황태는 겨우내 차가운 바닷바람에 얼렸다 녹였다를 반복해 말린 것으로 ‘더덕북어’라고도 한다. 얼어 부풀어 올라 더덕처럼 마른 북어를 의미한다. ‘노랑태’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는 잘못된 표현이다.

명태의 화려한 변신은 젓갈로도 그 빛을 발한다. 명태 알을 소금에 절인 것은 명란젓이고, 명태의 창자에 소금과 고춧가루 등의 양념을 쳐서 담근 젓은 창난젓, 명태 아가미만 손질해 소금을 뿌린 뒤 삭힌 것은 아가미젓이다. 그런데 창난의 난을 한자어 ‘란(卵)’으로 생각해 잘못 표기하는 이가 많다. 창난젓은 순 우리말로, 난은 알과 전혀 상관이 없다.

노가리 안주에 불콰해지면 여기저기에서 과장된 말, 거짓말 등 온갖 말들이 쏟아진다. ‘노가리 깐다’는 바로 이런 경우 어울리는 표현이다. 한꺼번에 수없이 많은 알을 낳는 명태의 특성에서 유래한 말로, 여기서 깐다는 ‘알을 낳다’는 의미다. 누구나 말이 많으면 실수가 있게 마련. 그러니 노가리는 ‘까지’ 말고 짝짝 찢어 잘근잘근 씹어야 제맛이다. “어떤 외롭고 가난한 시인이/밤늦게 시를 쓰다가/쇠주를 마실 때/(카아!)/그의 안주가 되어도 좋다/그의 시가 되어도 좋다/짜악짝 찢어지어 내 몸은 없어질지라도/내 이름만 남아 있으리라….”(양명문 시, 변훈 작곡 ‘명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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