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파도. 생소한 이름이다. 제주도의 부속섬 중 관광지로 주목받는 우도나 마라도에 비해 가파도는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 섬이다. 8일 제주 모슬포항에서 여객선을 타고 20여 분을 내려가자 섬 안에 우뚝 선 하얀 풍력발전기 2대가 눈에 들어왔다.
배에서 내리니 섬 곳곳이 친환경 에너지 설비다. 집집마다 지붕에 태양광 패널을 설치해 십시일반 전력을 모으는 모습이다. 도로에는 이곳의 바다색을 닮은 전기자동차 레이가 부지런히 다니고 있었다. 현재 가파도 주민 134세대 중 태양광 패널을 설치한 집은 48가구다. 1260만 원의 설치비용 중 주민은 10%를 부담하면 된다.
한국전력은 제주도와 공공으로 가파도를 ‘탄소 없는 섬’(Carbon Free Island)으로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이 섬에 마이크로그리드(Microgrid)를 구축하고 있다. 마이크로그리드는 섬 등 전력계통과 연계되지 않은 고립지역에서 태양광, 풍력 등 신재생 발전설비와 에너지저장장치(ESS)를 이용해 자체적으로 전력을 생산, 저장, 공급할 수 있는 소규모의 독립형 전력망을 말한다.
세계 마이크로그리드 시장은 2020년이면 400억 달러 규모로 성장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 바 있다. 가파도에서 한전은 전력망지능화, 스마트미터 보급, 시스템 구축 총괄 및 운영을 맡았다. 제주도는 사업주관, 전기차와 충전인프라 구축을 담당했다.
섬의 둘레길을 따라 걸어 내려가 한전이 설치한 마이크로그리드 운영센터로 향했다. 한쪽 벽면을 꽉 채운 대형 스크린에서는 발전기별 현황을 실시간으로 나타내고 있었다.
현재 가파도에는 △디젤발전기 450kW(150㎾급 3대) △풍력발전기 500kW(250㎾급 2대) △태양광발전 174kW(3㎾급 48가구, 30㎾급 1개소) △ESS(3.86MWh) 등 전력설비가 운용되고 있다.
가파도 주민들이 사용하는 전력에서 신재생에너지 비중은 아직 70% 수준이다. 에너지원 특성상 햇볕과 바람이 일정치 않아 불안정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디젤발전에 의존한다는 설명이다.
문제는 ESS 용량이다. 한전은 태양광과 풍령 등 설비와 함께 대용량 ESS의 가격이 내려가면 신재생에너지를 통해 100% 충당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날씨의 영향으로 불규칙한 신재생에너지지만 ESS를 충분히 확보해 저장하면, 흐리고 바람이 없는 날에도 저장해둔 에너지를 꺼내 쓰는 원리다. 지금까지는 6시간이 ESS 최장 기록이다.
운영센터 옥상으로 올라가자 섬 전체와 에메랄드빛 바다가 한 눈에 들어왔다. 마을의 가옥들은 전부 지붕을 밝은 황토색으로 물들였다. 하얀 벽에 파란 지붕으로 유명한 그리스 산토리니와 견줘 손색없는 풍경이다. 이 아름다운 섬의 중앙에서 미래형 풍차 같은 모습의 풍력발전기 2기는 힘차게 돌아가고 있었다.
가파도는 국내 에너지자립섬의 첫 적용 무대다. 면적이 0.85㎢로 아담하고 신재생에너지를 얻기가 용이하며 본섬과도 가까워 실험 무대로 제격이라는 평이다.
2011년 11월부터 지난달까지 3단계로 마이크로그리드를 구축하는 데는 143억 원의 예산이 소요됐다. 국비 14억 원, 도비 45억 원에 한전(40억 원)과 남부발전(25억 원) 등이 힘을 보탰다. 구축 사업은 이제 1단계 기본 인프라 구축과 2단계 운영시스템 고도화를 지나 시스템 안정화 단계에 있다.
진명환 가파도 마을이장(56)은 “3년 전만 해도 주민들이 반신반의하고 효과도 미미했지만, 최근 들어 가시적인 효과가 나면서 만족도도 올라가고 있다”며 “월 평균 5만~6만 원이 나오던 전기료가 7000~8000원대로 낮아졌다. TV 수신료를 빼면 5000원 수준인 셈”이라고 말했다.
돌아가는 길. 도착했을 때 배에서 같이 내렸던 관광객들이 어느새 제주행 여객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만큼 2시간이면 한 바퀴 둘러보고 갈 수 있는 가파도. 내릴 때만 해도 생경했던 이 작은 섬은 미래형 도시를 압축한 고마운 섬으로 변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