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상공회의소와 맥킨지가 임직원 4만여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한국기업의 조직건강도와 기업문화 종합보고서’에서도 비과학적 업무프로세스와 상명하복의 불통문화가 조직을 멍들게 하는 근본적인 문제점으로 지목했다. 하지만 갑작스런 조직문화 변화로 인한 부작용도 속출할 수 있어 ‘운영의 묘’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전근대적 조직문화 바꿔야 산다 = 삼성전자는 24일 수원에 있는 본사인 디지털시티에서 ‘스타트업 삼성, 컬처혁신 선포식’을 갖는다. 이날 구체적으로 조직체계의 내용이 담긴 것은 아니지만 전근대적 조직체계를 뜯어고치는 방향타를 제시할 예정이다. 이미 삼성전자는 현업부서에서 ‘사원-대리-과장-차장-부장’의 5단계 직급체계를 ‘사원-선임-책임-수석’ 4단계로 축소해 실행하고 있다. 삼성바이오로직스와 삼성바이오에피스는 이달 초부터 대리와 과장, 차장, 부장 등과 같은 기존 직급 대신 프로와 담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삼성생명 역시 이달 말부터 5단계 직급(사원-대리-과장-차장-부장)을 4단계(사원-선임-책임-수석)로 단순화하기로 했다.
LG전자는 연공서열 위주의 직급제를 업무 중심으로 전환하기 위한 인사시스템을 만들고 있다. 기존 5단계로 구분한 호칭은 그대로 유지하되 파트장이나 팀장, 프로젝트 리더 등 역할 중심 체제로 전환하는 방향이다.
이런 대기업의 직급제 파괴 바람의 시초는 CJ그룹이라 볼 수 있다. 2000년대 초 CJ그룹은 수평적 조직문화를 깨고 창의적인 조직문화 조성 차원에서 ‘님’ 호칭을 도입했다. 이어 2002년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이 CEO(대표이사)를 포함해 모든 임직원의 호칭을 ‘님’으로 정했다. 카카오와 합병한 이후에는 영어 닉네임으로 직급을 부르고 있다. SK텔레콤은 2006년부터 매니저 제도를 도입해 사용하고 있다. 기존 직책명을 유지하는 본부장, 실장 등 직책자를 제외한 직원들은 호칭을 매니저로 모두 단일화했다. 이 같은 기업문화 변화 바람은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 환경에 적응하고, 생산성 향상도 꾀하자는 의도에서 시작한 것으로 풀이된다.
대한상의 기업문화팀 전인식 팀장은 “한국기업 문화의 가장 큰 문제로는 상사와 부하직원 간 소통이나 업무 지시가 위계적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점”이라며 “조직 내 소통문화를 조성하기 위해서는 직급이나 호칭은 반드시 개선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직급제 폐지 부작용 우려 시각도 상존 = 직급제를 폐지했다가 다시 부활시킨 사례도 적지 않다. KT는 2012년 11월 이석채 전 회장 시절에 매니저 제도를 도입했지만, 황창규 회장이 취임 이후인 2014년 6월 접었다. 업계에서는 황 회장이 매니저 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한 뒤 직급제를 부활시킨 것으로 보고 있다. 이 같은 이면에는 매니저 제도가 공기업 잔재가 뿌리 깊게 남아 있는 KT에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한 것이 한 원인으로 지목됐다. 또 근속연수에 관계없이 매니저로 불리다 보니 직급제 승진의 동기부여 역할도 작용하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한화그룹도 메니저 제도를 도입했지만, 직급제를 다시 부활시켰다. 한화그룹은 수직적 문화 대신에 수평적 소통관계를 구축하기 위한 차원에서 2012년 11월 매니저 제도를 도입했지만, 직급제의 관행을 벗어나지 못하고 2015년 3월 회귀한 것이다.
직급제 전환을 검토하고 있는 일부 그룹들 역시 이 같은 부작용을 고려하고 있다는 후문이다. 제도 도입으로 얻는 것보다는 사기 저하와 혼란을 가중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크다는 점에서다. 이 때문에 직급제 폐지에 따른 ‘운영의 묘’를 살려 부작용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이사는 “대기업들이 소통을 중시하는 서구적 기업문화를 속속 도입하는 곳이 늘어나고 있지만 근본적인 문제 해결 방식은 아니라고 본다”며 “호칭 하나에 신경을 쓰기보다 기업의 본원적인 경쟁력을 키우는 데 집중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