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인물] 2월 26일 빅토르 위고(1802.2.26~1885.5.22)- 인류의 진보를 확신한 ‘레 미제라블’의 작가

입력 2016-02-26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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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시인 소설가 극작가 빅토르 마리 위고는 1802년 2월 26일에 태어나 1885년 5월 22일 사망했다. 생몰연도에서 알 수 있듯 격동의 19세기 전체를 살았던 사람이다. 그의 사상과 작품은 보수주의에서 자유주의, 공화주의로 변해갔지만 인류가 계속 진보할 것이라는 믿음과 정열은 한결같았다.

그는 10대 시절 일기에 “나는 샤토브리앙이 아니면 아무것도 되지 않겠다”고 썼을 만큼 어려서부터 문호가 되기를 소망했다. ‘마술사’라고 불리던 샤토브리앙(1768~1848)은 다재다능한 문필가이며 정치인이었다.

오늘날 샤토브리앙보다 더 유명한 위고의 대표작은 ‘파리의 노트르담’ ‘레 미제라블’ 등이 꼽힌다. 그는 1822년 시인으로 출발해 3년 만에 프랑스 왕실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기사 훈장을 받았다. 이 무렵부터 여러 잡지에 문학평론을 싣거나 논쟁에 참여하면서 낭만주의 문학이념의 초석을 다졌다. 7월혁명의 해인 1830년 2월 희곡 ‘에르나니’의 초연을 앞두고 벌어진 ‘에르나니 논쟁’에서는 위고 등 낭만파가 고전파를 압도했다.

하지만 그는 연극 실패와 맏딸 부부의 사고사로 실의에 빠져 1843년 이후 작품을 발표하지 않고 정치활동을 했다. 그러다 1848년 2월혁명을 비롯한 주위 정세에 자극돼 인도주의적 경향을 더 한층 굳혔다. ‘레 미제라블’(1862), ‘바다의 노동자(1866)’ 등 위고의 걸작은 대부분 이 시기에 나왔다.

1851년에는 루이 나폴레옹(나폴레옹 3세)의 쿠데타에 반대했다가 추방돼 벨기에와 영국 해협의 섬을 전전하며 거의 19년간 망명생활을 했다. 1870년 보불 전쟁으로 나폴레옹 3세가 몰락한 뒤에야 파리로 돌아와 국민적 시인으로 비교적 평온한 만년을 보냈다. 프랑스 정부는 그가 죽자 국장으로 장례를 치렀고, 팡테옹에 유해를 안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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