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이 ‘디플레이션 파이터’로 변모할 조짐이다. 내년부터 3년 동안 적용할 물가안정목표를 직전 수치(2.5~3.5%)보다 최대 1.5%포인트 낮춘 것. 국내경제가 ‘L자형’ 장기 침체에 돌입했다는 평가가 나올 만큼 경기둔화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이에 중앙은행인 한은이 물가를 제대로 잡아 디플레이션 먹구름을 완전히 거둬내겠다는 고육책을 펼쳤다.
◇ 가계소비 부진 등 수요·공급 모두 인플레 압력 약화
한은이 물가안정목표를 하향 조정한 배경에는 수요, 공급 모두 인플레이션 압력이 약화된 영향이 컸다. 국내경제의 일시적 공급충격이나 경기요인을 제외한 기조적인플레이션이 2012년 무렵부터 2% 내외로 하락했다는 것. 금융위기 이후 가계소비 부진, 기업의 투자유인 약화 등 악조건이 집약된 것이 경제 위축으로 이어졌다.
실제로 한은이 발간한 ‘12월 금융안정보고서’에 따르면 3분기 가계소득 대비 가계지출 비율은 76.9%로 전년동기대비 0.9%포인트 하락했다. 이는 2013년 3분기(78.7%)와 비교했을 때도 2%포인트 가까이 차이가 난다. 그 사이 가계부채 규모는 9월 말 현재 1166조원으로, 전년동기대비 10.4% 증가해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
기업들의 상황도 여의치 않다. 기업의 매출액 증가율은 올해 상반기에 마이너스(-) 7.1%를 기록했다. 대기업의 매출액 증가율은 -7.3%로 작년 상반기(-1.2%)보다 그 폭이 세 배 이상 확대됐다. 중소기업의 매출액 증가율은 같은 기간 3.8%에서 1.2%로 낮아져 성장세가 둔화됐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기업부채도 불어나고 있다. 명목 국내총생산(GDP) 대비 기업 핵심부채 비율은 작년 말 현재 105.3%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97.1%, 28개 회원국 기준)을 웃돌았다. 미국(69.2%), 영국(75.0%), 독일(54.5%)과 비교했을 때 두 배 가까이 차이 난다.
한은은 이 같은 국내 상황에 더해 원자재가격, 경제구조 변화 추세 등 물가여건을 감안했을 때 물가가 당분간 비교적 낮은 오름세를 지속할 것으로 예상한 것이다.
서영경 부총재보는 “계량모형을 이용해 우리경제의 후생을 극대화하는 적정 인플레이션을 경제안정, 경제성장, 자원배분 효율성 등 다각적인 측면에서 계산한 결과, 향후 3년간의 적정 인플레이션 수준은 2% 내외로 추정됐다”며 “2% 목표는 대다수 선진국이 채택하고 있는 목표 수준으로 안정적인 경제 성장을 도모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 민간연구소 전망 0.5%P 이상 차이나…33개월 장기 이탈 경험에 신뢰 ‘↓’
한은의 고민은 당장 내년 6월까지 물가상승률을 2%로 끌어올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수의 민간연구소가 추정한 내년 소비자물가 전망치는 대부분 한은이 이탈범위로 제시한 ±0.5%포인트를 벗어난다. LG경제연구원은 내년 소비자물가상승률을 상반기에 1.0%, 하반기에 1.3%로 각각 전망했다. 연간으로는 1.2%로 추산했다. 현대경제연구원 역시 내년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1%를 겨우 넘는 수준으로 내다봤다. 내년 상반기, 하반기는 각각 1.1%, 1.3%로,연간 기준으로는 1.2%로 점쳤다. 한국개발연구원(KDI)도 내년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최대 1.5% 상승하는데 그칠 것으로 내다봤다. 상반기 1.3%, 하반기 1.5%에 이어 연간으로는 1.4%에 머물것으로 추산했다. 민간연구소의 수치로 본다면 이주열 총재는 내년 6월 연단에 올라설 수도 있다. 한은 자체적으로 전망한 소비자물가는 내년 상반기 1.6%, 하반기 1.8%, 연간 1.7%다.
문제는 신뢰다. 한은의 물가안정목표에 대한 신뢰가 떨어진 상황인 만큼 이를 다시 얻을 수 있는지가 관건인 셈이다. 직전 물가안정목표는 2013년 1월부터 2015년 9월까지 33개월간 목표범위를 이탈했다. 이는 관련 제도를 도입한 1998년 이후 가장 긴 기간이다. 이에 일각에서는 물가안정목표 무용론도 제기하곤 했다.
물가안정목표를 채택한 국가 32개국 중, 목표 이탈 시 설명책임을 시행하는 국가는 단 6개국(영국, 이스라엘, 아이슬란드, 터키, 세르비아, 인도)에 불과하다. 설명책임 이행 요건 범위도 여타 국가(±1~±2%p)에 비해 좁게 설정했다.
전성인 홍익대 교수는 “물가목표가 0.5%포인트 이탈할 경우 국회에 가서 설명하겠다는 것보다 직위를 내려놓겠다는 각오로 임해야 한다”며 “땅바닥으로 내려가고 있는 경제를 한가하게만 바라볼 때가 아님을 명심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