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철순의 즐거운 세상] 은행을 밟으면서

입력 2015-10-16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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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필 겸 미래설계연구원장

어느 날 술에 취해 아파트 현관문을 들어서는데 무언지 내 뒤에서 툭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한밤중에 무슨 소리일까. 몸을 돌이키지 않은 채 가만히 귀를 기울였더니 또 툭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뭔가 일깨워주려는 듯 느낌표 하나가 하늘에서 떨어져 내려오는 것 같았다.

왠지 ‘너, 그러면 안 돼’ 하는 소리로 들렸다. 릴케의 시 ‘고대 아폴로의 토르소’ 마지막 행에 ‘너는 사는 법을 고쳐야 한다’는 말이 있는데, 그 느낌표는 바로 이 말을 해주는 것 같았다. 원문대로 번역하면 ‘너는 네 삶을 달라지게 해야 한다’지만 나는 내 번역이 좋다.

그것은 은행 열매였다.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도 은행나무는 잎을 키우고 열매를 맺어 노랗게 익히더니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도 그 열매를 떨어뜨리고 있었다. 이제 곧 잎도 다 떨구고 겨울을 날 채비를 하리라. 가을이 깊어지는구나. 남자는 가을을 탄다지만 떨어진 은행을 보면서 비추(悲秋)라는 말을 생각했다.

작년만 해도 몰랐는데 올해에는 유난히도 은행에 열매가 많이 열렸다. 여름부터 계속 가물자 은행나무는 더 열심히, 악착같이 열매를 맺었나 보다. 아파트 앞에 서 있는 몇 그루 은행나무는 저마다 다닥다닥 아닥다닥, 니글니글(?) 징그러워 보일 만큼 많은 열매를 달고 서 있다. 떨어진 열매의 악취가 견디기 어려울 정도다. 밟지 않으려고 조심해서 걷지만 주차된 승용차 위에건 어디에건 하도 많이 떨어져 비켜 가기가 어렵다.

중국 송나라 때의 구양수(1007~1072)는 달 밝은 가을밤에 책을 읽다가 무슨 소리인지 들려 아이에게 알아보라고 한다. 아이는 나가 보니 아무것도 없고 나무 사이에서 무슨 소리가 나더라고 했다. 구양수는 ‘그게 바로 가을 소리로구나’라고 한다. 빛나는 명문 ‘추성부(秋聲賦)’ 이야기다. 나무 사이의 소리[聲在樹間]가 가을의 소리이다.

이효석은 낙엽을 태우면서 갓 볶아낸 커피 냄새와 잘 익은 개암 냄새를 맡고, ‘연기 속에 우뚝 서서 타서 흩어지는 낙엽의 산더미를 바라보며 향기로운 냄새를 맡고 있노라면 별안간 맹렬한 생활의 의욕을 느끼게 된다’고 썼다. 빛나는 수필 ‘낙엽을 태우면서’의 눈대목이다.

아아, 그런데 나는 은행 열매 떨어지는 소리로 겨우 가을을 알고, 은행의 진한 똥냄새를 맡으면서 생활의 의욕을 느낄까 말까 하고 있구나. 은행 열매가 냄새를 풍기는 것은 천적을 막기 위한 방어활동이라는데, 땅에 떨어져 부패하면서 독성물질 빌로볼과 은행산(銀杏酸)이 악취를 일으킨다고 한다. 생명이든 무생명이든 썩을 때 악취가 나지 않는 것은 없다.

가로수의 은행 악취가 심하자 서울시는 기동반(은행 열매 없애는 사람들이다!)을 운영하는 한편 열매가 열리는 암나무를 사람들이 덜 다니는 곳으로 옮기는 일에 나섰다. 은행나무의 암수를 구별하는 기술도 개발됐다니 원천적으로 냄새를 없애는 일이 가능해지는 것인가.

은행의 악취를 이야기하다 보면 여섯 살 된 여자아이의 말이 생각난다. “엄마, 은행잎이 왜 부채처럼 생겼는지 알아?” “몰라. 왜 그렇지, 우리 딸?” “으응, 그건 은행이 똥냄새가 나서 부채로 부치라는 거야.”

생태학적으로는 영양이 풍부한 열매가 냄새를 풍기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부디 내 몸에서 남들이 참을 수 있을 정도로만 악취가 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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