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병호의 독서산책]서울대 공과대 교수 26인 ‘축적의 시간’

입력 2015-10-12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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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위기’ 공학자들의 절규

“현재 중국은 엄청난 인구 중에서 가장 똑똑한 젊은이들이 모두 공학분야로 가고 있습니다.” 한국의 디스플레이 산업을 가능케 한 선구자 중 한 명인 황기웅 교수의 지적이다. 그는 “평균적인 인재를 많이 길러 내는 것보다 소수여도 세계 시장을 뒤흔들 탁월한 인재를 길러내는 것이 중요한 때입니다”라고 강조한다. 같은 날 신문에는 “앞으로 어려운 수학 문제를 내지 않기로 했다”는 관련 부처의 입장이 실려 있다.

먹고사는 문제가 정말 만만치 않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현재의 생활 수준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만 그 당연함은 언제든지 허물어질 수 있다. 서울대 공과대학 교수 26인과의 인터뷰 형식으로 내놓은 ‘축적의 시간’(지식노마드)은 한국 제조업과 공학 기술의 현주소를 생생하게 전하는 심층 분석 리포트다. 한국의 식자층이나 미래에 대해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필독하기를 권하고 싶다. 개인의 자기계발 차원에서도 읽어볼 만하다. 그 어떤 미래 전망서보다 한 권의 책을 통해 기술과 산업의 변화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읽는 내내 피가 거꾸로 솟는 경험을 할 수 있는 보기 드문 책이기도 하다. 우리가 정말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해 있음을 현장에 정통한 공학자의 목소리를 통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는 공학자들의 고백이기도 하고 절규이기도 하다. “이대로 가면 필멸입니다”라는 메시지를 그들은 전하고 싶어 한다.

이종호 교수는 2000년대 초부터 상식을 깨는 발상의 전환으로 현재 세계 유수의 반도체 회사들이 사용 중인 핵심 기술을 개발해 냈다. 그는 7~8년 후에는 메모리 분야에서도 중국이 시장점유율 5~10%를 차지할 것이고, 이런 상황이 시작되면 걷잡을 수 없이 추격전이 벌어질 것으로 예상한다. 중국의 어마어마한 투자량도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핵심 위기의 육성에서 앞서가고 있기 때문이다. 베이징대와 칭화대에 대한 평가는 이렇다. “미국에 다녀온 적도 없는 학생들이 영어도 막힘없이 자신감 있게 잘합니다. 그리고 중국정부에서 투자를 많이 한 탓에 현재 반도체 분야의 회로, 소자 관련 최고 저널이나 콘퍼런스에 베이징대나 칭화대 사람들이 서울대 사람들보다 논문을 훨씬 더 많이 발표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박영준 교수는 세계가 플랫폼 시대로 가고 있는 상황에서 산업 전체의 맥락을 이해하는 설계자, 즉 아키텍트를 만들어 내는 데 한국이 실패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는 노키아가 일거에 사라진 것은 아키텍트의 부재 때문이라고 말한다. 애플의 잡스는 휴대폰을 들고 다니는 컴퓨터로 보았지만 노키아는 통신기기로 받아들였다. 이런 차이가 결국 기업의 성패를 갈랐는데 이 능력이 바로 아키텍트 능력이다.

현재 초미의 관심을 끌고 있는 사물인터넷 역시 만드는 기술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아키텍트 능력이 될 것이다. 그는 한국 공학교육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는다. “현재 외국 대학에서 하는 것들을 부분적으로 자꾸 카피하고, 산업체에서도 할 수 있거나 하고 있는 얘기와 유사한 것들을 반복적으로 하는 양상이 벌어지고 있다.” 그는 중국의 부상에 따른 위기를 “대학이나 정부 요원들이 중국을 다녀오면 한결같이 백기를 들고 싶은 마음이라고 토로합니다”라는 말로 대신한다. 나는 이 책을 정독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오길 기대한다. 우리가 이 험한 세상에서 어떻게 나라를 보존할 것인가를 고민하도록 만들어 주는, 현장의 목소리를 고스란히 담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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