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몇 번의 칼럼을 통해 평창동계올림픽에 대한 분산 개최 논의가 과연 현시점에서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자문해 보았다. 그리고 분산 개최가 현재 평창올림픽을 둘러싼 다양한 문제들에 대한 부분적 ‘정답’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진정한 ‘해답’은 될 수 없다는 의견에는 변함이 없다. 그렇다고 올림픽이라는 역사적이면서도 전국가적인 거사(巨事)를 앞둔 정부와 조직위의 준비 과정과 진행 상황을 지지하고 옹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평창을 둘러싼 다양한 이해관계자 간의 복잡한 갈등이 현재의 수준까지로 악화된 데에는 다른 누구보다 정부와 조직위의 책임이 가장 크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 한 명이다. 또한 평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분산 개최의 논의보다 오히려 올림픽 반납에 대한 고민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할 만큼의 급진적인 생각 역시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보다 근본적이면서도 핵심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지금 이 상황에서 올림픽 반납을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을 거의 본능적으로 알고 있고, 그것은 암묵적 상식이 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사회적 환경과 성숙도는 20년간의 노력 끝에 유치한 1976년 동계올림픽을 반납한 콜로라도의 그것과는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문제의 해결책은 무엇인가? 현재처럼 분산 개최를 주장하면서 반대론자나 정부 및 조직위에 반(反)하거나, 혹은 역으로 정부와 조직위 편에서 분산 개최론자들을 비이성적인 집단으로 몰아가며 극한의 대립을 보이는 것이 과연 해결책 마련의 단초라도 될 수 있을 것인가? 이는 집단이기주의와 진영 논리의 표상임은 물론, 나와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우리사회 병폐의 축소판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하다. 즉,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서 올림픽을 반납할 것이 아니고 이를 주장할 용기도 결단도 있지 않다면, 상생을 위한 다른 방안을 모색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 시작은 다양한 이해관계자가 상승(相勝)할 수 있는 방안이며, 그것은 지난 칼럼에서도 주장했듯이 반드시 평창과 강원도 주민들로부터, 그들의 관점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하지만 분산 개최에 대한 작금의 논쟁 가운데 평창 주민들에 대한 마음은 그 어디에도 없어 보인다. 허황된 경제 효과와 적자를 우려하는 분산 개최론자들의 주장은 수십 년간 소외받아온 평창 주민들의 마음을 대변하기보다는 경제논리로 모든 것을 설명하는 외부의 훈계에 가까워 보인다. 또한 유치신청서에는 ‘O2 Plus’ 대회로 만들겠다고 주장해놓고, 가리왕산의 무차별적 파괴로 ‘CO2 Plus’ 대회로 변질시키는, IOC와 정부에 휘둘리는 조직위의 미숙함에는 애당초 평창에 대한 마음 자체가 없어 보인다.
일반적으로 올림픽과 같은 메가스포츠 이벤트의 유치 목적은 스포츠 자체의 발전, 개최도시 홍보·발전, 경제효과 및 미디어·스폰서를 통한 상업적 혜택 등과 같은 4가지로 요약된다. 그리고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스포츠 자체의 발전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스포츠 자체의 발전이란, 엘리트스포츠의 경기력 강화가 아니라 생활체육 중심의 아래로부터의 저변 확대를 의미한다. 즉, 올림픽을 통한 강원 도민들의 삶의 질 제고, 건강증진, 동계생활스포츠의 활성화가 스포츠 자체의 발전을 의미하며, 지역주민들을 중심으로 한 이와 같은 인식의 전환만이 올림픽의 허황된 경제효과와 대회 이후의 적자운영의 걱정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논리이다.
하버드 대학의 피셔교수는 개개인의 이익을 반영하는 ‘입장’ 중심의 접근은 사회적 상호작용의 과정 안에서 또 다른 입장에 의해 필연적으로 중첩되고 침범되어 갈등의 시발점이 된다고 주장하며, 서로가 동의하고 이해 가능한 원칙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평창올림픽 이후에는 무엇이 남는가? 무엇이 남든, 남겨진 것을 짊어지고 갈 당사자는 강원 도민들이다. 그렇다면, 올림픽의 유산은 물질적 경제효과도 물리적 시설물도 아니라, 올림픽의 흔적들을 강원 도민들의 행복자산으로 현명하게 사용하고 이를 통해 국내 동계생활체육을 발전시키는 것이 될 것이다. 따라서 모든 논의의 시작이 그들로부터 시작되고 그들에게 맞춰져야 하는 것이 매우 당연한 논리이자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원칙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