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판을 두드려 몇 글자 쓰는 것도 귀찮은지 남이 만든 자료를 이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이모티콘으로 간편하게 인사를 대신하는 사람도 있다. 괜찮다 싶은 크리스마스카드나 연하장은 무한 복제되어 떠다닌다.
어떤 사람은 복 많이 받으라는 인사장은 물론 좋은 풍경이나 커피 한 잔 하시라는 사진 등을 12월 30일부터 1월 7일까지 간단 없이 보내 왔다. 기세로 봐 내일도 모레도 쉬지 않을 것 같다. 하도 성가시게 많이 보내 ‘이건 축복이 아니라 공격이네’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처음엔 씹었다고 할까 겁나서 일일이 답을 했다. 그런데 지금은 이 사람을 아예 차단해 버릴까 싶다.
또 어떤 사람은 아내의 이름으로 된 연하장을 메일로 보내왔다. 여자 이름만 있기에 “이게 누구래유? 사모님, 그러니까 본처가 쓴 것?” 이렇게 반문하는 답장을 보냈다(나는 아내를 흔히 본처라고 부른다. 하나도 이상한 표현이 아닌데, 사람들은 세컨드도 있느냐고 묻곤 한다). 그랬더니 미안하게 됐다면서 자기 이름을 추가로 넣어 메일을 다시 보내왔다. 그러니까 급조된 부부 합동 연하장이다.
이렇게 성가신 것들 말고 즐거운 것도 있었다. 크리스마스 무렵 나를 포함한 어느 단체 소속원 일곱 명의 사진을 이용해 ‘Happy holiday’라는 이름으로 동영상을 만들어 보낸 사람이 있었다. 음악에 맞춰 경쾌하게 또는 잔망스럽게 춤을 추면서 새해맞이를 하는 내용인데, 제일 친해선지 아니면 만만해선지 내가 완전 ‘주연공’이었다. 재미있었다.
지금까지 받은 연하장 중에서는 초등학교 때 서울에 간 사촌누나가 보내준 크리스마스카드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산골 아이에게 산타클로스와 사슴이 새겨진 그 카드는 한 권의 동화책이었고 찾아가고 싶은 별세계였다. 그런 감동까지는 기대할 수 없지만, 최소한 자기 목소리가 담긴 진정성 있는 연하장을 받고 싶다.
이해인의 ‘새해의 기도’라는 시를 읽는다. 1월부터 12월까지 농가월령가처럼 그달의 소망을 차례로 읊은 시인데, 거꾸로 12월부터 옮기면 이렇다. ‘12월에는 내 마음에 감사가 일어나게 하소서/ 계획한 일을 이루었든 이루지 못했든/ 지난 한 해의 모든 것을 감사하게 하소서.’ 아하, 사람들이 그래서 연하장을 그렇게 많이 보내는구나.
그러면 지금과 같은 1월에는 무슨 생각을 해야 되지? ‘1월에는/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소서/ 그동안 쌓인 추한 마음 모두 덮어 버리고/ 이제는 하얀 눈처럼 깨끗하게 하소서.’ 이 시를 읽으면서 성가시고 귀찮다는 생각을 덜고 있다. 어쨌든 복 많이 받느라고 올 새해에도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