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중은행 상품개발 담당자인 김모(가명)씨는 올 들어 중소기업 대출 상품명에 ‘기술’이라는 단어를 붙이고 있다. 지난해 말까지는 ‘창조’라고 제목을 붙였지만 올해 상반기부터는 ‘기술금융’이라는 말이 새롭게 부각됐기 때문이다.
#모 손보사 상품개발에 근무하는 박모(가명)씨는 최근 한숨이 절로 나온다. 정부 정책에 발맞춰 장애인연금보험을 개발해 출시했지만, 실적이 부진하기 때문이다. 동료들은 그만 고민하라고 하지만 몇 달을 고민해 만든 상품이 고객들에게 외면받자 박씨는 공허함마저 느낀다고 토로한다.
수십년간 정권이 바뀔 때마다 항상 경제를 살리자는 목표 아래 새로운 정책을 내걸었다. 김대중 정부는 벤처, 이명박 정부는 녹색경제, 박근혜 정부는 창조경제를 화두로 던졌다. 이같은 정부 정책은 고스란히 금융회사의 부담으로 작용했다. 금융당국에서는 정부 정책에 발맞춰 금융회사에 정책금융 출시를 독려했다.
정책금융은 성공한 사례도 있지만 실패한 사례도 적지 않다. 장기간 시장 환경 등을 조사하지 못한 채 무리하게 정권의 출범에 발맞춰 정책금융 상품을 출시했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부 시절 야심차게 추진했던 동북아 금융허브는 사실상 허깨비만 남아 있다. 한국이 도쿄, 홍콩에 이어 아시아 3대 금융허브가 되는 것은 고사하고 세계 50대 자산운용사 본부 중 서울에 들어온 곳은 단 한 곳도 없다.
이명박 정부 시절에 추진됐던 ‘녹색금융’도 마찬가지다. 이 대통령 재임 기간이었던 2009~13년 녹색성장 관련 펀드만 총 86개가 출시됐지만, 정권이 바뀌면서 녹색금융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정부 정책 기조에 따라 금융상품을 내놓는 금융회사의 ‘보조 맞추기’는 박근혜 정부에서도 계속되고 있는 상태다. 박근혜 정부가 하우스푸어 지원방안 조치 중 하나로 고정금리 대출 활성화를 위해 올해 도입한 ‘적격전환대출’은 4개 은행의 판매 실적을 합쳐 봤자 7건(8억800만원)에 불과했다.
2013년 8월 28일 서민·중산층 주거안정을 위한 전·월세 대책 후속 조치로 탄생한 ‘오피스텔 구입자금 대출’도 5건에 불과했다. 4개 은행 중에서는 신한은행이 유일하게 1억3300만원의 미미한 실적을 올렸다.
보험업계 역시 상황은 마찬가지다.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 공약인 4대악 척결에서 모티브를 얻어 만든 ‘4대악 보험’은 지금까지 가입계약 건수가 제로(0)이다.
정책금융 상품이 매번 실패로 돌아간 것은 아니다. 무분별하게 출시된 정책금융 상품들 중 틈새시장을 형성해 가파르게 성장세를 보이고 있는 상품들도 있다. 그 예가 바로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 활성화를 위해 탄생한 기술금융이다.
국내 시중은행의 기술신용대출 총액은 7월 말 1922억원에서 8월 말 7221억원으로 급증했다. 또한 지난 9월 말에는 1조8334억원을 기록했고, 10월 말을 기준으로는 대출 총액이 3조원을 넘어선 것으로 잠정 집계되고 있다. 정부와 금융당국 역시 금융권의 대출 지원 확대를 위한 제도 개선에 주력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이명박 정부 시절 서민들을 위해 출시한 ‘햇살론’과 ‘보금자리론’의 경우는 2금융사인 저축은행들이 새로운 수익원으로 선호하면서 다시금 활로를 찾고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정권의 코드에 맞춰 금융회사를 동원하는 ‘떼거리 금융’ 문화는 국내 금융산업을 퇴행시키는 근본적 원인 중 하나라고 진단했다. 제대로된 시장 환경의 조사 없이 ‘탁상공론’식 정책만 꾀한다면 지난 정부의 실패를 답습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김종훈 새누리당 의원은 “금융당국이 소비자나 서민을 위해 정책금융 상품을 내놓는 취지는 이해하지만 철저한 사전조사 없이 출시해 금융 소비자의 호응이 없는 경우가 많다”며 “정책금융 상품을 출시하기 전에 철저히 준비해 실질적 혜택을 줄 수 있는 상품을 개발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