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A씨는 최근 차명거래금지법 시행을 앞두고 프라이빗뱅커(PB)센터를 찾았다. 그동안 임대소득과 사업소득으로 모은 돈을 자녀 명의로 예·적금을 들어 뒀는데, 이를 해지해야 하는지 여부를 상담하기 위해서다. A씨는 그간 소득을 자녀 명의로 분산해 금융소득종합과세를 피해 왔다.
차명거래금지법이 시행되면 자녀 명의의 예·적금에는 증여세가 부과되고, 실명 전환할 경우에는 종합소득세를 피할 수 없다. 결국 A씨는 PB와의 상담 끝에 금융자산의 절반을 현금으로 보유하고, 절반은 실물자산이나 비과세상품에 분산투자하기로 결정했다.
◇‘세금 피하자’ 자산가 뭉칫돈 대이동 = 차명거래금지법 시행을 앞두고 고액 자산가들의 시름이 깊어지고 있다. 마지막 절세 수단이던 차명거래가 사실상 원천 금지되면서 자산가들이 대안 마련에 몰두하고 있는 것이다.
오는 29일부터 차명거래를 원칙적으로 금지하는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 이른바 불법 차명거래금지법이 시행된다. 차명거래가 비자금 마련의 우회적 통로로 활용되고 있다는 지적이 잇따르자 국회는 논의 끝에 지난 5월 ‘차명계좌 사용을 금지하는 금융실명거래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차명거래금지법 시행이 코앞으로 다가오며 자산가들의 뭉칫돈 대이동도 시작되고 있다. 기준금리 인하로 예금 금리 1%대의 초저금리가 지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마지막 세테크 수단으로 꼽힌 차명거래마저 원천 금지되며 자산가들의 예금 이탈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은행이 이달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내린 2%로 결정하면서 기준금리가 사상 최저 수준으로 낮아졌다. 시중은행의 주요 예·적금 금리는 연 1%대까지 떨어졌다. 기준금리가 인하되며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고려한 실질금리는 마이너스로 접어들었다. 여기에 차명거래금지법이 시행되며 자산가들의 예금 이탈을 부추기고 있다.
실제로 국민, 신한, 우리, 하나 등 4대 시중은행의 잔액 5억원 이상 개인 정기예금은 지난 9월 말 기준 16조1910억원이었다. 지난 3월 말(17조1570억원)보다 9660억원 줄어든 규모다. 6개월 새 1조원 가까이 감소했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고액 자산가들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 세금과 관련된 이슈”라며 “제로 금리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차명거래금지법 시행으로 예·적금을 그냥 둘 경우 종합소득세의 대상이 되고, 자식 앞으로 둘 경우 차명거래에 따른 증여세 문제가 불거질 수 있어 자산가들의 자산 이동이 가속화되고 있는 것 같다”고 밝혔다.
◇자산가 뭉칫돈 어디로=금융권에서는 자산가들이 예금에서 자금을 빼내 주식상품이나 저축성보험 등에 투자하는 경향이 강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은행에서 이동한 거액의 자금은 보통 원금이 보장되면서 연 4∼5%대 수익률을 기대할 수 있는 주가연계증권(ELS)이나 주가연계파생결합사채(ELB), 채권형펀드 등의 중수익·중위험 상품으로 몰리고 있다는 것이다.
비과세인 보험 상품의 매력도 부각되고 있다. 보험 상품은 10년 이상 유지하고, 납입기간 5년 이상이면 이자소득에 대해 비과세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일시납의 경우 2억원까지 비과세 혜택이 주어진다.
다만 금융권으로 거액이 유입되기보다는 현금으로 금괴를 사 두거나 은행 대여금고와 장롱 속에 보관하는 등 자금이 음지로 숨어들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5만원권의 연도별 환수율은 발행 첫해인 2009년 7.3%에서 2010년 41.4%, 2011년 59.7%, 2012년 61.7% 등으로 상승하다가 지난해 48.6%로 하락한 뒤 올해 1∼9월은 24.4%로 크게 낮아졌다. 특히 지난 7~9월 발행된 5만원권은 4조9410억원, 같은 기간 환수된 5만원권은 9820억원으로 환수율이 19.9%에 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