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말 서울 강남의 한 은행 지점에 60대 초반 고객이 찾아왔다. 금융자산만 50억원을 갖고 있는 이른바 슈퍼리치로 분류되는 거액의 자산가다. 그는 이달 중에 10억원의 예금과 적금·펀드의 만기가 돌아오자 절세 방법을 찾기 위해 프라이빗뱅커(PB)에게 상담을 요청했다.
그러나 고민이 더 깊어졌다.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3명의 자녀와 부인 명의로 각각 분산 투자할 계획이었지만, 담당 PB가 오는 29일 시행되는 차명거래금지법에 저촉된다며 현금을 보유하든지 금, 부동산에 투자할 것을 권했다. 차명계좌를 이용해 금융소득종합과세를 회피하려던 그는 1㎏짜리 금 골드바를 구입했다.
고액자산가들의 재테크 셈법이 변하고 있다. 이미 차명계좌금지법을 회피하기 위한 대응이 시작했다. 일단 이들은 차명거래만큼은 피하고 보자는 심리가 지배적이다. 차명거래가 절세 효과를 노릴 수 있는, 즐겨 쓰는 재테크 전략 중 하나였지만 감당해야 할 리스크가 너무 커져 울며겨자 먹기식으로 실명전환이나 실물 투자로 눈을 돌리고 있다.
자산가들 사이에선 올 상반기 해외금융계좌납세협력법(FATCA)이 이슈였다. 하반기 들어서는 차명거래금지법이 최대 돌발 변수로 꼽히고 있다.
실제로 지난해 금융소득종합과세 기준 금액이 4000만원 초과에서 2000만원 초과로 강화되자 자산가들은 예금 명의를 분산하는 방법으로 금융소득을 줄여 과세 대상에서 빠져 나갔다. 차명계좌를 이용해 금융소득종합과세를 회피했다는 얘기다.
그러나 당장 29일부터는 절세 목적의 차명거래가 불법으로 규정된다. 그동안 명의를 분산해 금융소득종합과세를 회피할 수 있었지만 가족을 포함해 다른 사람 이름으로 자신의 돈을 예금해서 세금 혜택을 보면 형사 처벌을 받게 된다. 절세 대안 중 하나가 사라진 셈이다.
국회는 차명거래가 비자금 마련의 우회적 통로로 활용되고 절세를 노리는 재테크 수단이 됐다는 지적이 잇따르자 수년간의 논의 끝에 지난 5월 차명계좌 사용을 금지하는 금융실명거래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차명거래가 드러날 경우 5년 이하 징역 또는 5000만원 이하 처벌을 받게 된다. 특히 이 법안은 불법 차명거래를 중개한 금융회사도 제재를 하도록 했다. 차명거래 적발에 따른 과태료는 종전 500만원에서 5000만원까지 크게 늘었고 위반행위 가담 정도에 따라 징역형에까지 처해질 수 있다.
차명거래는 가족간의 명의를 빌려 분산 예치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다. 다만, 범죄 목적이 아닌 가족간 소액 차명거래나 동창회, 종친회 통장 등 이른바 선의의 차명계좌만이 허용된다. 전문가들은 차명거래는 앞으로 국세청의 금융정보분석원(FIU) 자료 활용 등 여러 분석 방법을 통해 노출될 가능성이 높아 탈세보다는 절세를 통해 해법을 찾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결국 차명계좌금지법 시행이 자산가들의 ‘쩐의 이동’을 촉발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실제 은행권에서는 고액 예금이 대거 이탈하고 있다. 지난 5월 금융실명제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한 이후 4대 시중은행의 5억원 이상 정기예금이 1조원 이상 감소했다.
앞으로 차명거래금지법이 시행되면 고액 계좌에서 자금 이탈이 더욱 가속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시중은행의 자산관리(WM)담당 부행장은 “1~2년 전부터 거액 자산가들이 돈을 빼기 시작했고, 미처 대비하지 못한 일부 자산가들은 법 시행 한두 달 전에 급히 자금을 빼가고 있다”고 말했다.
또 A은행 PB센터 L팀장은 “지난 5월 법안 통과 시점부터 자산가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며 “이미 기존의 차명계좌들은 대부분 정리된 상황”이라고 말했다. 자산가들 사이에선 예금자산을 현금화해 금고에 비축하거나 실명 전환 또는 합법적인 증여을 통해 이미 어느 정도 정리를 마친 것으로 금융권은 분석하고 있다.
이에 따라 앞으로 자산가들이 선택할 수 있는 대안으로는 금이나 5만원권과 같은 실물자산으로 전환하거나, 부동산 투자 등에 국한될 전망이다. 실제로 최경환 부총리가 적극적인 경기부양 의지를 내비치고 있어 실물에 대한 자산가의 관심이 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