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균 프로젝트’는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의 '3일 천하'에 빗댄 표현으로, 친윤(친윤석열)계가 한 후보를 대표직에서 쫓아낼 것이라는 주장이다.
친윤계는 이에 대해 사실이 아니라고 반박한 바 있다. 다만 “친윤계 A 의원이 전직 친윤계 의원 B 씨와 회동했다”는 등의 목격담은 그치지 않고 있다.
후보들 간 감정의 골도 깊어졌다. 한 후보는 이날 CBS에서 진행된...
1884년 조선에서는 갑신정변이 일어났습니다. 맹목적으로 청나라에 의존하고 그들만 섬기던 조선 왕조에 맞서 급진 개화파가 일으킨 정변이었지요. 3일 만에 무너진 정변이었으나 우리나라 최초의 정치 혁명이었습니다.
기초과학을 시작으로 인문학과 천문학까지 발전시킨 19세기 유럽과 같은 시기 조선을 맞비교할 수 없습니다. 다만 2024년 현재를 빗대보면 140년 전...
☆ 고균(古筠) 김옥균(金玉均) 명언
“일본이 동방의 영국 노릇을 하려 하니 우리 조선은 적어도 동양의 프랑스가 되어야 한다.”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주도한 조선 후기 정치가. 근대화된 일본을 직접 시찰한 그는 일본의 힘을 빌려 조선의 개혁을 결심했다. 1884년 12월 4일 신축한 우정국(郵政局) 청사 낙성연을 계기로 거사해 수구파를 제거하고 정변을 일으켰다....
1991년 문화일보 창간호에 연재를 시작한 '국수'(國手)는 27년 만인 2018년 6권으로 끝맺었다. 1880~1890년대 임오군란, 갑신정변, 동학농민운동 등 격변을 배경으로 조선 예인과 민중의 삶을 다뤘다.
고인은 신동엽창작기금상(1985), 현대불교문학상(1998·2002), 이태준문학상(2016) 등을 수상했다.
빈소는 건국대충주병원 장례식장 5호실, 발인은 27일이다.
청와대는 2일 일본의 화이트리스트(수출 심사 우대국 명단·백색국가) 한국 배제와 관련해 ‘임오군란’, ‘갑신정변’, ‘청일전쟁’, ‘아관파천’, ‘카쓰라-태프트 밀약’, ‘을사늑약’, ‘한일강제병합’ 등을 언급하며 맞대응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나타냈다. 또 사실상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폐기하겠다는 뜻도 보였다.
김현종 청와대...
마치 임오군란, 갑신정변 속에서 수구와 개혁파가 다투며 눈치만 보던 때가 연상된다. 서로 도덕적 헤게모니 싸움만 할 뿐이다.
조선 후기와는 달라야 한다. 19세기 말처럼 한반도가 두 강대국의 각축장이 되는 상황에서 더욱 그러하다. 일본은 18세기 후반부터 중국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서구를 내재화했다. 짜장면을 처음 대했던 우리 조상들이 먹어 보지도 않고...
조선시대 형장(처형정)으로 세계 최대 순교성인을 배출한 공간이자 동학농민운동, 갑신정변 등 국사범 처형 장소로 조선후기 역사적 의미가 있는 장소다.
서울시 관게자는 "역사문화콘텐츠를 담은 서소문역사공원이 조성돼 한국 성지순례길 및 조선 후기 역사성 회복 등 다양한 관광지와 연계한 관광인프라가 조성될 것"으로 기대했다.
이곳은 김옥균과 박영효 등 개화당이 갑신정변을 일으킨 역사의 현장이다. 거사가 삼일천하로 끝나고 우정총국은 폐쇄됐다.
이후 우정총국 건물은 학교와 기념관으로 쓰이다가, 2012년 우편 업무를 다시 시작하고 사료를 전시하는 등 우정 문화의 상징적인 장소로 새롭게 태어났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우정총국 초대 총판이었던 개화당 홍영식의 흉상이 관람객을...
갑신정변에 가담하였으나 실패로 끝나자 미국으로 망명해 한국인 최초의 서양 의사가 되었고, 조국으로 돌아와 한국 최초의 민간신문인 독립신문과 독립협회를 창간·창립하고 독립문을 건립한 언론인이자 개화운동가·독립운동가. 오늘은 그가 서거한 날. 1866∼1951.
☆ 고사성어 / 후생가외(後生可畏)
젊은 후배들은 두려워할 만하다는 뜻. 곧 젊은 후배들은...
이렇게 김기수가 소개한 연필은 갑신정변(1884년 12월 4일)이라는 근대사의 중요한 분기점에 드라마틱하게 등장한다. 그날 밤 김옥균은 일본군의 출동을 위해 고종의 친서(親書)가 필요했다. 사람이 다치고 포(砲)소리가 들리는 등 벼루에 먹을 갈고 붓을 들 여유가 없는 상황이었다. 더구나 노상(路上)이었기 때문에 김옥균은 고종께 연필을 올렸고, 고종은 연필로...
임오군란(1882), 갑신정변(1884), 청일전쟁(1894), 을미사변(민비 시해, 1895) 등 말도 안 되는 기막힌 사건들의 내막이 고종 민비·이하응(대원군)·김병덕·김홍집·김옥균 ·김윤식·홍영식 등등 당시 인물들의 언행, 처신과 함께 ‘회상록’ 형식으로 소개되는데, ‘운미(芸楣)’는 민비의 친정에 양자로 들어가는 바람에 ‘원하지 않은 권좌에 어쩔 수 없이 앉은’ 척신(戚臣)...
갑신정변이 실패한 뒤, 신천군(信川郡) 두라면(斗羅面) 청계동(淸溪洞) 산골로 은거하였다. 중근은 어려서부터 총명함과 강건함을 갖춰, 말 타고 활쏘기도 즐겨 하였다. 조마리아는 그의 기질을 존중해 키웠다. 남편이 동학농민 전쟁 중 김구와 인연을 맺은 것을 계기로, 그의 어머니 곽락원과 자매처럼 항일투쟁에 동참하였다.
남편과 사별한 뒤 평안남도 삼화항으로...
김 본부장은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의 교차로에 위치한 우리 민족은 지도자들의 통찰력과 안목 부족으로 임오군란, 갑신정변, 청일전쟁, 아관파천, 러일전쟁, 가츠라태프트 밀약, 을사늑약, 한일합방의 뼈아픈 경험을 했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지정학적 속성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다. 이런 환경에서 우리 통상 협상가들은 주인의식을...
서재필은 갑신정변 실패로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갑오개혁이 진행 중이던 1895년 귀국한다. 이어 입각하라는 개혁 내각의 제의를 고사하고 독립신문을 창간한다. 서재필은 독립신문을 통해 정부와 위정자들을 가차 없이 비판하며 탐관오리들의 부정부패를 폭로한다. 조선의 독립은 민중이 조선의 현실을 똑바로 아는 데서 비롯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누구의 눈치도...
세종의 넷째 아들 임영대군의 15대손이었던 그는 박영효(1861~1939.9.21)의 청지기로 있다가 1884년 갑신정변에 행동대로 참여했으나 사흘 만에 실패로 끝나자 일본으로 망명했다. 이때 양잠업을 하는 집에서 잡역부로 일하다 나카무라 우메코와 만나 결혼했다. 처가에서 운영하던 정미소의 사환으로 일한 인연으로 이토 히로부미와도 친분을 쌓았다.
그는 미국으로...
이 소장은 특히 어려웠던 문제로 갑신정변이 있었던 시기를 촘촘한 연표 사이에서 골라야 했던 11번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변화과정을 폭넓게 물은 17번을 꼽았다.
이성민 종로학원 한국사 팀장도 이번 수능이 올해 6·9월 모의평가보다 어렵게 출제됐다 평했다. 이 팀장은 “6월, 9월 시험이 지나치게 쉽게 출제된 것에 대한 비판을 의식하여 난이도를 다소 상향 조정한...
삼별초의 대몽 항쟁에 대한 역사 지식의 이해(5번), 갑신정변의 개혁 정책 발표 시기에 대한 연대기적 파악(11번), 균역법 시행의 상황 및 쟁점 인식(9번), 삼국과 가야 문화의 일본으로의 전파 양상 탐구(4번), 발해의 성립과 발전에 대한 자료 분석 및 해석(3번), 일제강점기 청산리 대첩에 대한 역사적 상상 및 판단(16번) 등 다양한 유형의 문항들을 출제했다.
새로운 유형과...
하지만 당시 조선은 갑신정변으로 안전이 보장되지 않아 일본에 체류하면서 한국어에 매달렸다. 1885년 부활주일인 4월 5일 그는 꿈에 그리던 한국 땅을 밟았다. 당시 조선 정부가 선교활동을 불허했기 때문에 그는 일단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국립병원 제중원(濟衆院)에서 물리와 화학을 강의했다. 제중원 시절 영어로 된 ‘조선어 문법’도 발간했다.
이후 선교가...
서재필 선생은 1882년 문과에 급제해 김옥균 등과 함께 1884년 12월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청나라의 개입으로 3일 만에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했다. 일본 정부가 망명객들을 박해하자 다시 미국으로 망명해 고학으로 미국 조지워싱턴대에 입학해 박사 학위를 받았다. 1895년 귀국한 선생은 1896년 4월 독립신문을 창간했으며, 같은 해 7월 국내 동지들과 함께...
이른바 갑신정변이다.
그러나 청군 1000여 명이 6일 오후 무력 개입해 궁궐을 공격했다. 결국 개화당은 화력이 압도적인 청군에 궁궐을 빼앗기고, 정권은 삼일천하로 끝났다. 그는 훗날을 기약하며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 9명의 동지와 함께 일본으로 망명했지만 일본 정부도 우호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온갖 박해를 가했다. 결국 그는 1894년 3월 중국 상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