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전, 황무지나 다름없던 서울시 구로구 구로3동에 연기나는 공장들이 하나둘씩 들어서기 시작했다. 3년 뒤 이곳 43만㎡ 부지에는 소규모 공장형 산업단지가 탄생했다. 바로 최초의 공업단지인 수출산업공단이자 지금의 G밸리 1단지의 시초다. 당시 우리나라 수출 사상 처음으로 1억 달러를 넘어서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하며 엄청난 외화를 벌어들였던 이곳은 반세기 만에 초고층 빌딩 숲을 자랑하는 벤처기업의 심장부로 탈바꿈했다.
G밸리가 50여년간 바닥부터 시작한 ‘성장형’ 산업벨트라면 최근에는 처음부터 아예 최첨단으로 꾸려진 ‘완성형’ 산업밸리도 탄생했다. 바로 판교테크노밸리다. 역사는 3년으로 G밸리와의 격차는 어마어마하지만 특화된 최첨단 분야, 계획된 신도시와 입주기업 등 계획 하에 조성된 곳으로 새로운 형태의 신산업단지가 기대되는 곳이기도 하다. 오랜 기간 형님으로 꿋꿋하게 산업단지를 지켜온 G밸리와 짧지만 신세대 감각으로 톡톡 튀는 판교테크노밸리를 분석해 본다.
오전 8시 20분. 게임회사에 다니는 30대 직장인 A씨가 출근을 위해 강남역에서 지하철을 기다린다. 정확히 4분 후 도착한 정자행 신분당선에 몸을 실은 A씨. 눈 한번 붙일 새도 없이 약 14분 후 지하철에서 내린다. 판교역이다. A씨는 역 앞에서 고민한다. ‘마을버스를 탈까, 걸을까.’
결국 걷기로 결정한 A씨는 길을 따라 10분 정도를 걷는다. 오전 8시 48분. A씨의 눈앞에 아기자기한 산업단지가 점차 제 모습을 드러낸다. ICT기업들이 즐비한 판교테크노밸리다. 강남에서 판교테크노밸리까지 출근하면서 걸린 시간은 약 30분. A씨의 ‘판교 라이프’는 서울과 30분 떨어진 곳에서 이렇게 시작된다.
◇우수 연구인력 흡수… 접근성 좋아 ‘인기’= 판교역에서 판교테크노밸리에 들어서려면 ‘개나리교’라는 예쁘장한 다리 하나를 건너야 한다. 이곳은 직장인들이 출근을 위해 건너는 다리지만 야간엔 조명이 켜져 운치있게 변신한다.
판교테크노밸리는 다른 산업벨트와는 태생부터가 다르다. G밸리처럼 중앙정부가 나선 것이 아닌,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 지자체인 경기도가 조성했다. 역사도 극과 극이다. 50년이 넘은 G밸리가 사람 나이로 중년에 해당한다면 판교테크노밸리는 본격 조성된 지 3년 정도 밖에 안되는 ‘유아’에 가깝다. 분야도 보다 특화됐다. ‘ICT 중심의 R&D단지’가 콘셉트로 IT, BT, CT, NT분야 기업들이 한데 모였다. 경기과학기술진흥원에 따르면 판교테크노밸리에는 지난해 8월 기준 약 700개의 입주사와 약 4만명의 근로자가 근무하고 있다.
역에서 도보 10분 거리인 판교테크노밸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곳이 있다. 엔씨소프트의 R&D센터 건물이다. 초입 부분에 위치해 있고 커다란 관문 모양의 건물이 시각적으로 특이해 눈길이 머무는 곳이다. 엔씨소프트 이외에도 넥슨, 네오위즈게임즈 등 게임회사들이 모여 있어 ‘게임 메카’로 불리기도 한다. 판교테크노밸리 내 게임회사들 간 인적 교류도 활발하다.
판교테크노밸리에서 근무 중인 한 직장인은 “2011년도 조성 초기만 해도 식당이나 정류장에 사람이 거의 없었는데 최근 엔씨소프트 등 게임업체들이 연이어 들어오고 나서 식당에도 줄을 설 정도로 사람들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이 같이 우수 R&D 인력들이 최근 판교로 적을 옮기고 있는 이유는 서울과 가까워진 접근성 덕분이다. 근처에 분당-내곡, 서울-용인 고속도로가 있는데다 신분당선 개통으로 전철역이 생겨 강남과 불과 10여분 거리로 가까워졌다. 죽전, 수지 신도시에선 차로 출퇴근하면 20여분이면 가능하다. 판교테크노밸리지원본부 임종빈 운영기획팀장은 “실제 삼성테크윈 같은 경우 과거 창원연구소 시절 연구인력 뽑는 데 애로가 많았지만 판교로 옮겨오고 나서는 상황이 달라졌다”면서 “또한 강남 테헤란밸리에서 벤처거품이 사라진 후 우수 IT인력들도 많이 흡수하고 있다”고 말했다.
◇금융위기 악재 딛고 기업유치 성공… 근무환경도 ‘눈길’= 엔씨소프트 R&D센터를 지나 조금 더 들어가면 SK케미칼의 판교사옥인 ‘에코랩(Eco lab)’이 등장한다. 화학과 제약사업을 주 업종으로 하는 SK케미칼은 판교테크노밸리 내 대표적 BT기업이다. 맞은편엔 SK케미칼 컨소시엄이 들어설 건물이 한창 공사 중에 있다. 임 팀장은 “현재 총 44개 사업자 중 준공된 30곳을 제외하고 공사 중인 곳이 11개, 미착공 건물이 3개 정도”라며 “현재도 임대 사업자들에게 하루에 한두 통씩 꾸준히 문의가 올 정도”라고 밝혔다.
밸리 조성 과정에서 애로사항은 없었을까. 당시 분양과정에 참여했던 임 팀장은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자금 사정이 나빠진 기업 10여곳이 대금 납부 연기를 요청하는 등 한때 어려움을 겪은 바 있다”면서 “일부는 견디지 못하고 결국 계약이 해지됐지만 나머지 기업들은 2011년까지 3번에 걸쳐 유치에 성공했다”고 소회했다. 당시 일반연구용지에 입주하려던 기업들의 경쟁률은 8대1 정도. 이 같은 경쟁을 거쳐 가장 먼저 일반연구용지에 입주한 기업은 2010년 4월 삼성테크윈이다.
총 부지 규모가 66만1000㎡인 판교테크노밸리는 걸어서 약 20분이면 횡단할 수 있다. 점심시간 때 한손에 커피를 들고 삼삼오오 산책을 하는 직장인들도 꽤 있다. 건물들 사이에는 아기자기한 조형물은 물론 광장도 조성해 밸리 내 직장인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SK케미칼 판교사옥에서 근무 중인 한 직원은 “다른 곳들에 비해 단지가 깨끗하고 은행, 카페 등 편의시설이 잘 조성돼 있어 편리하다”며 “단지 영화, 극장, 백화점 등 문화시설이 조금 떨어져 있다는 점은 옥에 티”라고 말했다.
◇판교밸리 “국내외 R&D 허브로”= 판교테크노밸리는 아직 걸음마 수준의 산업벨트다. 경기도도 우선 오는 2016년까지는 산업벨트 기반구축에만 집중할 계획이다. 그렇지만 향후 발전 방향은 뚜렷하다. ‘국내외 R&D 허브 육성’이 골자다. 사업화 이전의 모든 R&D의 중심을 판교로 가져가겠다는 목표다.
임 팀장은 “판교테크노밸리가 지역 제조업의 R&D를 전담하고 지역에서 사업화를 추진한다든지, 정부연구 결과를 판교 입주기업들이 상용화할 수 있도록 연계 협력을 강화하는 등의 여러 방안을 추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직장인들이 근무하고 싶은 환경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 판교테크노밸리는 다른 산업벨트에 비해 뛰어난 편의 환경을 갖췄지만 주차공간이 부족한 것은 옥에 티다. 판교테크노밸리의 한 직장인은 “점심 때만 되면 도로 양옆에 주차된 차가 즐비할 정도로 주차공간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판교테크노밸리지원본부도 부지의 추가 확보 필요성을 인지하고 있다. 임 팀장은 “용지 추가 확보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많이 나오고 있다”며 “산업벨트는 이론적으로도 유기적으로 확장해 나아가야하는 것이 속성인데 아쉬운 부분”이라고 언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