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환전상에서 출발한 은행은, 중세교회로부터 고리대금업자로 지탄받을 만큼, 저리로 모은 자금을 고리로 대출해 막대한 부를 챙겼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오늘날 세계 금융을 쥐락펴락하는 은행의 뿌리에는 이런 고리대금업 속성이 내재해 있다.
이탈리아 중부지방 피렌체 공화국의 평범한 중산층 가문으로, 중세 르네상스의 시작인 문예부흥을 후원했던 메디치 가문의 메디치 은행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 옛날 메디치 가문의 문예부흥 후원활동은 오늘날 금융권 사회공헌활동의 시초 격이다.
금융의 기본 속성은 대출이다. 착한 빚을 내세우며 대출을 권하지만, 연체하면 약탈자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흔히 세상살이의 험난함을 뜻할 때 ‘눈 뜨고 있는데 코 베어 가는 세상’이라고 한다. 금융의 약탈적 면모, 무지막지한 채권추심은 정말 눈 뜨고 코 잘릴 만큼 위협적이다.
여전히 시중은행의 문턱은 높고, 요구 조건도 까다롭다. 학력으로 대출금리를 차별할 정도다. 빚 권하는 사회의 이면에는 약탈적 대출도 서슴지 않는 금융사 간 무한경쟁이 자리한다. 사회공헌활동 하며 방긋 웃는 가면 뒤의 본 모습이다. 금융은 서민의 동반자이자 약탈자인 셈이다. 약탈적 대출이 없었다면, 금융은 부를 축적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개선됐다고 하지만, 금융권의 약탈적 대출은 진행형이다. 저축은행의 대학생 평균 대출금리가 연 31%라고 한다. 약탈적 수준이다. 대출액은 최근 3년 새 71% 급증했다. 감독 당국이 대부업에 한눈 판 사이, 빈사상태에 빠진 저축은행이 대학생을 희생양 삼아 회춘한 결과다. 감독 당국의 허술한 관리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약탈적 대출이 만연한 금융권에 변화의 조짐이 시작됐다. 한 저축은행이 연 10%대 후반의 대출상품을 선보이면서다. 은행거래가 어려운 저신용 서민고객들에게 대부업체보다 한도는 높고 금리는 낮게 만든 것인데, 이름하여 ‘KB 착한 대출’이다.
통상 대부업체에서 300만원을 빌릴 경우 금리는 연 최고 39%가 적용된다. 하지만 착한 대출 상품은 19%로 500만원을 빌릴 수 있다. 금리는 20%p 낮고 대출한도는 200만원 정도 많다고 한다.
이 상품이 나오게 된 데는 임영록 KB금융지주 회장의 의지가 컸다. 그는 ‘때맞춰 내리는 비, 시우(時雨) 금융’의 필요성과 함께 서민상품 출시를 약속했고, 착한 대출로 지켰다. 격려에도 불구, 최고경영자(CEO)로서 수익감소와 위험 관리가 수반되는 시험대에 올라선 기분일 게다.
그동안 금융권은 ‘착한 대출’에 인색했다. 그들 사전에는 적어도 최근까지는 약탈적 대출만이 존재했을 뿐이다. 착한 대출과 약탈적 대출은 CEO 맘먹기에 달렸다. 널리 전파돼서 약탈적 금융의 오명을 씻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