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오롱은 국내 대표 섬유기업이다. 누구도 이 같은 수식어에 대해 의문을 표하지 않는다. 그만큼 코오롱은 한국 섬유산업에 있어 큰 족적을 남겼고, 정통성을 지니고 있다. 코오롱이 효성과 함께 국내 섬유산업을 논할 때 빠지지 않는 이유다.
때문에 코오롱은 자신들의 뿌리가 된 섬유사업에 대해 애착이 강하다. 최근 수처리 사업 등 미래 먹거리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지만 기존 섬유사업에 대한 속도도 늦추지 않고 있다. 섬유사업의 부가가치를 끌어올리기 위해 고기능성 원사, 원단을 개발 및 생산하는 등 움직임이 활발하다. 일부 대기업들이 자신들을 성장하게 한 ‘뿌리 사업’들을 축소하고 신사업에만 몰두하는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코오롱그룹은 지난해 8조5000억원의 매출을 올린 데 이어 올해는 10조원까지 바라보고 있다. 조그만 나일론 회사로 시작해 이젠 국내 재계를 대표하는 대기업집단이 된 코오롱그룹. 국내 대표 섬유기업 코오롱의 뿌리와 역사를 살펴봤다.
◇현재 코오롱 발상지엔 아파트 단지가= 코오롱그룹의 발상지는 처음 나일론 공장을 설립했던 대구다. 옛 주소로 대구시 동구 신천동 1090번지. 현재는 대구시 수성구 지역이다.
이곳은 지금 아파트 단지 만이 늘어서 있다. 과거 이 곳이 공장 터였다는 사실을 외관상으로는 확인하기가 힘들다.
코오롱그룹이 1974년 대구공장을 구미로 이전했기 때문이다. 당시 코오롱은 대구공장 부지가 주택가에 위치해 있어 공해 등의 문제점이 제기될 것을 우려했다. 이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구미공단으로 생산시설을 이전한 것. 이후 공장 부지였던 4만평 규모의 땅은 주택지가 됐다.
코오롱그룹은 창립과 관련한 기념사업을 하지 않고 있다. 발상지에 관련 상징물도 찾을 수 없다. 다만 창업자인 오운(五雲) 고 이원만 회장이 과거 대구시 중구 진골목에 거주했다는 후문이 전해져 오고 있다.
이원만 창업주은 1951년 일본인과 합작해 삼경물산이라는 무역회사를 세웠다. 일본 선진 문물에 눈을 뜬 이원만 회장은 1952년 처음으로 나일론을 접하게 된다. 나일론은 질기고 윤기가 흐르며, 세탁을 해도 금방 마른다는 장점 때문에 ‘기적의 섬유’라고 불렸다. 당시 일본에서도 나일론의 인기는 뜨거웠다.
이에 이원만 회장은 1953년 나일론을 한국에 들여왔다. 한국에서의 성공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이원만 회장의 예상대로 나일론은 한국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고 사업 확장의 기회를 제공했다. 1954년 서울에 삼경물산 사무소를 개소하고, 아들인 이동찬 명예회장에게 대표를 맡겼다.
이후 이원만 회장 부자는 섬유사업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한다. 단순히 무역회사를 통해 나일론을 들여오는 것에 그치지 않고, 국내에서 가공 처리하는 사업을 구상하게 된다. 일본으로 나가는 외화를 절약하고, 이윤도 높아질 것이란 판단에서였다.
1956년, 이원만 회장은 국내 나일론 공장 설립을 체계화한다. 대상 도시는 제1의 섬유도시로 유명한 대구. 이원만 회장은 당시 대구시 동구 신천동 1090번지의 농림학교 부지와 실습지인 뽕밭을 매입했다. 인근에 변전소가 위치해 있는 등 지리적인 이점이 있었지만, 공업용수를 끌어오기가 힘들다는 점은 이원만 회장에게 골칫거리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중국인 점장이까지 부를 정도였다. 훗날 아들인 이동찬 명예회장은 “점장이까지 부를 정도니 아버지도 최초 나일론 공장 계획만큼은 쉽게 포기할 수 없었던 것 같다”고 소회했다.
이어 1957년 4월, 현재 코오롱(주)의 전신인 한국나일론주식회사가 출범했다. 대구 나일론 공장은 그해 11월 착공, 1958년 10월 완공됐다. 국내 최초의 나일론 공장이었다. 이는 국내 섬유사업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됐다.
이어 1963년 8월에는 하루 생산량 2만5000톤에 이르는 총 1900평의 나일론 원사 제조공장을 구미 공단에 준공했다. 지금은 나일론 및 폴리에스터 원사를 포함, 고기능성 원사 및 원단을 생산하는 코오롱인더스트리, 코오롱패션머티리얼 등 공장이 구미에 자리 잡고 있다.
◇‘코오롱’ 사명 달고 신성장동력 박차= 한국나일론은 1977년 한국포리에스텔과 합병, 주식회사 ‘코오롱’으로 상호를 변경한다. 이와 함께 이원만 회장의 아들 이동찬 명예회장이 경영자로 나서게 된다. 본격적인 2세 경영의 시작이었다.
코오롱은 이동찬 명예회장의 취임과 함께 지속적인 연구개발 투자를 통한 기술혁신에 속도를 냈다. 1973년 국내 최초로 자동차소재(타이어코드) 사업에 진출했고, 1980년대부터는 필름 및 산업자재 등으로 사업 영역을 확대해갔다.
이와 함께 고부가가치 섬유 제품 개발에도 박차를 가했다. 1993년 초극세사를 이요한 고도의 원사기술, 초정밀 공정관리 기술이 결집된 첨단 섬유소재 ‘샤무드’를 세계에서 3번째로 양산한다. 최근에도 친환경 트렌드에 맞춰 ‘네오벤트’, ‘에코프렌’ 등 고기능성 원사, 원단 생산 및 연구개발에 매진하고 있다.
이 같은 섬유사업 고부가가치화와 사업 다각화 움직임은 1996년 코오롱그룹의 3번째 수장으로 취임한 현 이웅렬 회장 때까지 이어지고 있다. 최근엔 수처리 분야에 관심을 쏟고 멤브레인 등 관련 사업을 진행 중이다. 이웅렬 회장이 이끄는 코오롱그룹은 사업 다각화를 통해 오는 2015년까지 25조원의 매출을 달성하겠다는 각오다.
◇‘수평론’ 창업정신, 코오롱을 지탱하는 뿌리= 섬유산업은 서민생활과 밀접한 분야다. 의식주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가격이 터무니없이 비싸서도, 기능성이 떨어져서도 안 된다. 기술력은 물론, 공익적인 부분도 간과할 수 없는 분야가 바로 섬유사업이다.
섬유기업 코오롱의 창업정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원만 회장은 평소 ‘수평론’을 강조했다. 수평론이란 ‘수평선 위는 상(上)이요, 아래는 (下)이며, 상에는 상지상(上之上)이 있고, 하에도 역시 하지하(下之下)가 있다’는 그의 평소 지론이다.
다소 난해하지만 풀이하자면, ‘상지상’은 국가와 개인에게 모두 이익이 되는 것을 뜻하고, 반대로 ‘하지하’는 국가와 개인에게 모두 해를 끼치는 것으로 분류했다.
이원만 회장의 수평론은 결국 상지상 사업을 지향하고 있다. 섬유사업을 통해 국가와 서민들에게 모두 이익이 되는 사업을 펼치고자 했던 것이다.
당시 이원만 회장은 “현재 우리나라와 겨레의 급선무는 자립경제”라면서 “기업인은 모름지기 상지상의 사업에 몰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실제 이원만 회장은 이 같은 자신의 지론을 사회에 전파했다. 5·16 이후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주재한 경제인간담회에서도 이원만 회장은 농공병진(農工竝進, 농업과 공업을 함께 발전시킴)을 추진하되, 공업공가로 나가야한다고 강력히 주장하는 등, 국가의 여러 가지 경제 정책 의견을 쏟아냈다.
1963년엔 한국산업수출공단 창립위원회 위원장을 맡으면서 구로공단(현 구로디지털단지)과 구미공단 조성을 이끌기도 했다. 이원만 회장은 이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1968년 대통령상, 1977년 은탑산업훈장을 수상했다.
이 같은 이원만 회장의 창업정신은 현재 대기업집단으로 성장한 코오롱에게도 이어지고 있다. 코오롱은 ‘윈윈 커뮤니티(Win-Win Community)' 구현을 목표로 지역사회, 협력사, 중소기업과의 동반성장에 적극 나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