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금소진 빨라 지속가능하지 않아
미래세대위해 개혁 더늦춰선 안돼
1995년 보건복지부 사무관들이 전국 시도에 퍼져 그해 첫 시행된 농어민연금을 소개하고 가입시키는 일을 맡았다. 당시 미혼이던 필자는 출장 기간이 3개월로 가장 길면서도 가장 먼 제주도를 맡았다. 제주는 낮에 농민들은 감귤 전정(가지치기)을 하고, 어민들은 바다에 나가있어, 일을 마친 후 저녁 8시께가 돼서야 이장님 혹은 어촌계장님 댁에 음식을 마련해놓고 주민들을 모아 연금을 설명할 수 있었다. 당시 “이거 뭐 보험인가? 이거 하나 들면 총각은 얼마나 받는 거요?”라던 한 할머니의 질문이 떠오른다. 모든 국민이 국민연금 개혁을 놓고 수치 하나에 열을 올리는 지금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
당시와 지금의 또 다른 큰 차이로는 후한 설계가 있다. 많은 국민이 가입할 수 있도록 일종의 유인책 차원이었다. 1988년 도입 첫해의 보험료는 3%, 소득대체율은 70%, 수급개시연령은 60세였다. 소득 100만 원인 가입자가 월 3만 원씩 보험료를 40년간 내면 60세부터 월 70만 원을 받는 구조였던 것이다. 보험료는 이후 1993년 6%, 1998년 9%로 각각 인상됐다.
국민연금에는 크게 두 차례의 개혁이 있었다. 1998년 1차 개혁으로 소득대체율은 60%로 인하됐고, 수급연령은 5년마다 1세씩 올려 2033년 65세로 설정했다. 2007년 2차 개혁을 통해 소득대체율은 2008년 60%에서 50%로 인하하고, 매년 0.5%포인트 인하해 2028년 40%에 이르도록 했다.
현재 국민연금의 모습을 살펴보자. 국민이 내는 보험료율은 9%, 소득대체율은 42%(2024년 기준)이다. 지난해 말 기준 가입자는 2238만 명에 수급자는 662만 명으로 월 평균 연금수령액은 62만 원이다. 적립금 규모는 올해 4월 말 기준 1103조 원으로 노르웨이, 일본에 이은 세계 3대 연기금이다.
이렇듯 연금이 변화를 거듭하는 동안 연금에 영향을 주는 핵심요인인 인구구조에도 많은 변화가 찾아왔다. 합계출산율은 1988년 1.55명에서 2023년 0.72명으로 반토막났다. 반면 기대수명은 70.7세에서 83.5세로 늘고, 고령화율은 4.7%에서 올해는 19.51%로 급증해 20%를 목전에 두고 있다.
100년이 넘는 연금역사를 가진 주요 선진국과 비교하면 우리나라의 연금은 36년에 불과하다. 주요 선진국들처럼 연금개혁 또한 우리에게 수순으로 다가왔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의 평균 보험료율은 18.2%, 소득대체율은 42.3%이다. 소득대체율은 엇비슷하지만 보험료율이 절반인 셈이다.
건강한 신체를 위해 건강검진을 주기적으로 받듯, 균형있는 연금 재정을 위해 5년 주기로 재정추계를 실시하고 있다. 지난해 진행된 제5차 재정계산에 따르면 국민연금은 2041년 수지적자가 발생하고 2055년 기금 소진이 예상된다. 2018년 4차 재정계산 때보다 수지적자는 1년, 소진시점은 2년 앞당겨졌다.
지난해 10월 정부는 5차 재정추계 결과와 전문가 논의, 국민 의견을 반영한 제5차 종합운영계획을 국회에 제출했다. 21대 국회에서 여야 공동으로 연금개혁특별위원회를 설치한 뒤 공론화를 거치며 연금개혁을 위해 노력했으나 아쉽게도 열매를 맺지는 못했다. 이제 22대 국회가 개원했다. 7월 16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에서도 국민연금, 기초연금, 퇴직연금, 개인연금 등 구조개혁의 범위에 대해서는 다소 차이가 있었지만 여야 모두 미래세대를 위해 지속가능한 연금개혁이 필요하다는 데는 의견을 함께했다.
코로나19가 한창이던 2021년 3월 백신이 처음 나오자 한 기자가 “아스트라제네카, 화이자, 모더나 중 어느 백신이 가장 좋습니까”라고 물었다. 당시 코로나중대본 제1통제관을 맡고 있던 필자의 답변은 “가장 빨리 맞는 백신이 최고의 백신입니다”였다. 연금도 마찬가지다. 개혁이 늦어질수록 그만큼 적자가 누적돼 미래세대에 더 큰 부담을 안길 뿐이다. ‘천천히 서둘러라’라는 로마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의 말처럼 할 일과 할 수 있는 일을 구분해 서둘러 하는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