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서 뇌전증으로 인한 사망자가 매일 한 명 이상 발생합니다. 거점 병원 지정을 더는 미룰 수 없습니다”
국내 뇌전증 전문 의사들이 환자 지원을 위한 거점 병원 체계를 마련할 것을 정부에 촉구했다. 일본과 미국 등 주요 선진국은 뇌전증 환자 관리 시스템이 자리잡았지만, 한국은 이를 쫒아가지 못하고 있단 지적이다.
대한뇌전증센터학회는 21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대한뇌전증학회 국제학술대회에 참석한 해외 의사들과 함께 ‘한국의 뇌전증 치료와 환자들의 관리를 향상하기 위한 국제기자회견’을 개최했다. 이 자리에는 한국, 일본, 미국의 뇌전증 전문 의사들이 참석해 각국 치료 환경을 공유했다.
뇌전증은 뇌신경세포에 과도한 전류가 흘러 반복적으로 신체 경련과 발작이 발생하는 뇌질환이다. 발작의 빈도와 세기는 환자마다, 때에 따라 다르다. 연구에 따르면 뇌전증 환자의 돌연사율은 건강한 사람의 17배, 수술이 필요한 중증난치성뇌전증 환자는 30배 높다.
뇌전증 환자는 신체적 고통만큼 정신적 고통도 상당하다. 학계는 환자의 50%가 우울증, 40%는 불안증, 30%는 자살사고를 경험한다고 추정한다. 특히 학업, 취업, 결혼 등 생애주기마다 질병으로 인한 좌절을 경험하고 심리적으로 위축되기 쉽다.
해외에서는 뇌전증과 정신건강을 함께 관리하는 ‘포괄적 뇌전증 치료’가 보편화했지만, 국내 상황은 대조적이다. 진료 시간이 짧고, 전문 인력과 인프라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대한뇌전증센터학회에 따르면 최소·최대 진료 시간은 한국 2~5분, 일본 15~30분, 미국 30~60분이다. 뇌전증 치료 및 상담 전문 시스템이 구축된 ‘거점 뇌전증 지원병원’은 일본이 28곳, 미국이 260곳을 운영 중이지만 한국엔 없다.
한국은 소수의 대형 병원으로 환자들이 몰려 진료의 질이 더욱 하락하는 양상이다. 뇌전증 전문 의료진을 두고 수술까지 가능한 병원은 국내 6곳에 불과하다. 이 가운데 4곳은 서울에 있다. 반면, 일본은 각 지역의 뇌전증 치료가 질적으로 평준화돼 49개 현의 각 대학병원으로 환자들이 분산된다.
학계는 연간 약 10억 원 수준의 예산 지원으로 거점 체계를 구축할 수 있다고 추산한다. 각 병원에 전문간호사나 사회복지사를 뇌전증지원코디네이터로 두고, 이들의 인건비와 사회사업비 등을 합산한 규모다.
나카사토 노부카즈 일본 도호쿠 대학 교수는 “도호쿠대 병원은 원내 자체적인 지원이 더해져 환자 1명과 최대 1시간 30분까지 진료와 상담을 진행할 수 있다”라며 “뇌전증지원코디네이터들이 활동 중이고, 현재도 계속해서 시스템을 추가로 발전시키고 있다”라고 말했다.
홍승봉 삼성서울병원 신경과 교수(뇌전증지원병원협의체 위원장)는 “일본처럼 가까운 옆 나라도 높은 수준의 뇌전증 치료를 시행 중인데, 우리나라 환자들은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라며 “국내 18개 국립대병원을 중심으로 지원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라고 촉구했다.
신동진 가천대 길병원 신경과 교수(대한뇌전증학회 회장)는 “뇌전증 거점 병원 체계가 자리를 잡으면, 이를 기반으로 뇌전증 이외의 신경과 질환과 각종 만성질환 환자를 관리하는 전국적인 시스템을 형성할 수 있다”라며 “정부의 관심과 지원이 절실하다”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