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분야에는 주요한(43), 김동환(23), 김종한(22), 노천명(14), 모윤숙(12), 서정주(10)의 이름이 보인다. 최남선은 7편을 썼다. 소설과 희곡 분야에는 이광수(103), 이석훈(19), 최정희(14), 채만식(13), 정인택(13), 유치진(12), 함대훈(11) 7명이 10편 이상을 썼다. 김동인은 9편을 썼다. 평론 분야에는 최재서(26), 김용제(25), 박영희(18), 김기진(17), 백철(14), 정인섭(11)이 이름을 올리고 있다.
‘친일 작품’으로 간주한 기준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옹호, 일본의 침략 전쟁에 대한 찬성, 내선일체와 대동아공영권에 대한 동의, 징병과 징용 정책에 대한 동조, 신사참배나 창씨개명에 대한 환영 등이었다. 글로써 반민족행위를 한 것이 틀림없고, 이는 우리 문학사에 기록된 최대의 수치로 간주해야 한다. 그래서 미당문학상, 팔봉비평문학상 시상이 중단되었고 동인문학상에 대해서도 해마다 비판의 목소리가 터져나오고 있다.
그런데 이 모든 이 가운데 서정주가 유독 친일 문인의 대표자로 간주되어 교과서에서 그의 작품 게재가 배제되고 있다. 이유가 있다. 5공 정권 초기에 “한강을 넓고 깊고 또 맑게 만드신 이여”로 시작되는 ‘전두환 대통령 각하 56회 탄신일에 드리는 송시’를 썼기 때문에 가중처벌된 셈이었다. 몇 년 동안 학부생과 대학원생에게 ‘국화 옆에서’를 쓴 시인이 누구냐고 물어보고 있는데 아는 학생이 단 한 명도 없었다.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사실이다.
주요한이 가장 많은 친일 시를 발표한 것이 놀랍고, 이광수가 무려 103편이나 되는 친일 작품을 썼다는 것도 놀랍다. 온 국민을 친일파로 만들겠다는 각오가 없었다면 쓸 수 없는 편수가 아닌가 한다. 군산에 채만식문학관이 있는데 그가 13편이나 되는 작품을 썼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미당은 나의 스승이기도 하여 미당문학관에 간혹 가는데 갈 때마다 관람객이 한 사람도 없어 가슴이 아팠다. 또한 벽에 죽 걸려 있는 ‘송정오장송가’ 등 시인의 친일 작품을 볼 때면 우리 문학의 치부를 들여다보는 느낌이 들어 비탄에 잠기게 된다.
일제강점기 후반기에 엄청난 수의 일본어 작품이 창작되었다. 일본 녹음서방 출판사에서 2001년에 ‘근대조선문학 일본어 작품집 1939~1945’ 전 9권이 출간되었다. 실로 엄청난 양의 작품이 이 기간에 일본어로 창작된 것이다. 위 명단에는 빠져 있는 이효석의 일본어 작품집 ‘은빛 송어’의 한글 번역판이 나왔는데 5편의 소설과 9편의 수필이 실려 있다. 번역자 송태욱은 이효석의 일본어 실력에 감탄하면서 그에게 있어 모어는 조선어지만 모국어는 일본어였다고 한다. 그만 그랬을까? 이효석의 일본어 작품은 주로 내선일체사상에 동조하면서 민족의식 사이에서 갈등하는 내용이다.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이처럼 엄청난 굴절을 겪었는데 광복 이후에는 우(중앙문화협회)와 좌(조선문학가동맹)로 나뉘어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다. 1946년부터 월북해 북한 문단 조직에 가담한 문인은 이기영, 한설야, 안막, 최명익, 안함광, 송영, 박세영, 이북명, 이찬, 백석, 김사량 등이었다. 1947년 이후 정부 수립 시까지 남로당 간부들과 함께 월북한 문인은 이태준, 김남천, 임화, 이원조, 안회남, 허준, 지하련, 오장환, 임학수, 조운, 함세덕 등이었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과 대동 월북 또는 지리산 빨치산 운동 가담자로는 박태원, 이용악, 설정식, 정인택, 임서하, 현덕, 유진오(兪鎭五) 등이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 문단에서는 월북 문인의 북한 체제 찬양 작품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유독 문학상이 제정되었던 서정주, 김기진, 김동인이 타깃이 되어 몰매를 맞고 있다.
고등학교 교실에서 서정주의 친일시와 명작들이 함께 다뤄지면 안 되는 것일까? 대학교 문학 수업 시간에 백석이 공산화된 북한에서 살면서 쓴 체제 찬양 시들이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과 함께 논의될 수는 없는 것일까? 공과 과를 함께 따지는 것이 좋지 않을까? 지금처럼 서정주의 모든 작품이 묻혀버리는 일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