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창] ‘흥정’이 사라져가는 세상

입력 2023-10-27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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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식당에 가면 주문 받으러 오는 사람이 없다. 네모난 기계 얼굴이 고개를 빳빳이 들고선 자기를 톡톡 눌러 주문한 뒤 카드로 결재하라고 명한다. 좀 있으면 주방에서 조리한 요리를 들고 사람이 나온다. 이 사람마저 언젠가 로봇으로 변하게 될까? 매표소 직원도 은행 창구 직원도 경비원도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여기 짜장 둘! 하나는 곱배기! 설렁탕 둘에 갈비탕 하나! 돈까스 둘에 생선까스 둘!

주인이나 종업원이 주방에 대고 외치는 목소리가 줄어들고 있다. 기계로 주문을 받아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음식을 들고 나오는 사람의 표정도 냉랭하다. ‘맛있게 드세요’라는 말도 이상하게 냉랭하게 느껴진다.

운전자는 알 것이다. 어떤 건물 지하로 들어가 차를 둬야 할 때 경비원이 있었는데 거의 다 사라졌음을. 고속도로를 달리다 잠시 멈추고 아리따운 여성과 인사를 나누곤 했는데 이제 그런 일이 뜸해졌다. 어느새 기계시대, 기계사회, AI시대, 챗GPT세상이 되고 말았다. 우리 사회가 더욱 편리해졌는지 모르겠지만 겨울바람처럼 냉랭해졌다. 미소를 띠고서 인사를 나누고, 안부를 전하고, 날씨 얘기를 하는 분위기가 거의 사라져 버렸다.

내가 사는 동네 근처에 꽤 큰 시장이 있다. 없는 게 없는 것 같다. 아, 명품백 같은 건 없다. 손님이 상인에게 묻고 상인이 손님에게 답하고 설명하는 소리만 해도 시끄러운데 시장 곳곳에서 고래고래 고함치는 젊은이들이 있어 귀청이 따갑다. 몇 분 동안 싸게 판다느니, 오늘은 이 물건을 얼마에 판다느니, 평소 시세보다 얼마를 더 싸게 판다느니 하는 호객의 외침이 귀청을 왕왕 울려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다. 저 친구 저러다 목이 안 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 소리가 귀에 거슬리지 않는다. 인간성이 느껴지고 정이 느껴진다.

아내는 상인과 흥정을 한다. 덤으로 더 달라고 할 때도 있고 약간의 에누리를 요구하기도 한다. 상인은 손님의 요구를 냉정하게 거절한다. 그런데 아내는 서운한 표정도 짓지 않고 돈을 내곤 ‘많이 파세요’ 하고 그 가게 앞을 떠난다. 으레 하는 부탁이고 거절인 것이다. 평균 열 번에 한 번, 흥정이 성공을 거둔다. 시장이 파할 무렵에 가면 성공의 확률이 좀 더 높아진다. 그럼 아내는 득의양양한 표정을 짓는다. 그래 봤자 몇 백 원 혹은 일이 천원 득을 본 것일 텐데, 기분이 좋아지는 게 무슨 심보인지 잘 모르겠다.

시간이 많이 흐르고 나서야 나는 아내가 매번 흥정하는 이유를 알았다. 시장에도 가게마다 저울이 있어 정찰제인 셈인데 사람이 손으로 집어 무게를 다는 것이므로 이른바 융통성이 가능한 세계다. 아내는 시장에서 물건 사는 재미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임을 나는 뒤늦게 알았다. 물건을 사는 사람은 좀 더 달라, 물건을 파는 사람은 그럼 밑진다 하면서 대화를 나눈다. 상인 입장에서는 ‘이 아줌마 내가 세 번이나 거절했는데 또 한 줌 더 달라고 하네, 에라 오늘은 인심 좀 쓴다’ 하면서 한 줌 더 주고, 그럼 단골이 되는 것이다.

백화점 시스템에 이런 대화나 흥정이 있을 수 없다. 판매와 구매가 있을 뿐이다. 생선 물이 좋다고 말해주는 사람도 없고 과일 맛이 좋다고 말해주는 사람도 없다. 유통과 소비 사이에 계산대가 있다. 이제는 24시간 편의점도 무인 판매점으로 바뀌고 있다. 밝은 불빛 아래 물건들만 있다. 카드로 결제하고 나올 때 사람이 ‘안녕히 가세요’라고 인사도 하지 않는 비정한 세상, 이런 세상이 우리가 꿈꾸었던 세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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