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수희 칼럼] 너무 일찍 어른이 되어 버리는 아이들

입력 2023-08-05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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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 아이에 대한 이혼 부모의 면접교섭(2)

임수희 수원지방·가정법원 안산지원 부장판사 칼럼

(사진 출처 = 게티이미지뱅크)
(사진 출처 = 게티이미지뱅크)

조정실 밖 복도 의자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고1 수학문제집을 몇 장이나 풀고 있던 현우의 모습은 몇 년이 지난 아직도 생생해서 잊히지가 않습니다.

조정실 안으로 따라 들어오라며 “문제 풀기 어렵지 않아?”라고 묻자, “할 만 해요.”라며 어른스럽게 대답하던 현우는 자리에 차분히 앉으면서 미소를 지어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왜 수학문제집을 푸느냐는 질문에 “수학 문제 풀 때가 제일 마음이 편해요.”라며 또 슬쩍 웃어 보였고요.

그런데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어 보는 동안 현우는 무슨 말에든 끝에 “그래도 괜찮아요.” “하지만 괜찮아요.”를 자꾸 붙여 말했습니다. 그래서 진짜 괜찮다는 건지, 아니 안 괜찮아서 자꾸 괜찮다고 자신을 다독이는 것인지 헷갈렸습니다. 그러나 아빠가 현우에게 부엌칼을 쥐어 주고 찌르라면서 같이 죽자고 했을 때는 “너무 무서웠지만” “그래도 아빠가 그 후에 미안하다고 말해서” “지금은 괜찮아요.”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을 때는 결코 현우가 괜찮을 리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그때에도 현우는 웃으며 말했지만 입 꼬리만 올라간 앙다문 가느다란 입술이 떨리고 있었습니다.

자주 술을 먹고 폭력적이 되는 아빠한테 지쳐서 이미 엄마는 집을 나가버렸고 그 상태에서 이혼소송을 냈습니다. 그런 아내에게 화가 나서 더 폭음을 하고, 남겨진 아이들에게 “늬 엄마가 이혼하면 죽어버리겠다.”는 말을 수시로 하던 아빠는 어느 날 술김에 아빠를 찌르라며 현우 손에 칼까지 들려주게 된 것이었어요.

아빠 몰래 집에 가끔 들러서 반찬 해 놓고 빨래나 청소도 해 주고 가시던 엄마가 “현우야, 넌 다 컸으니까 아빠 말 잘 듣고 현미 잘 돌보고 공부 잘 하고 잘 있어.”라고 했었고, 현우는 집을 나간 엄마 대신 자기만큼은 아빠 곁을 지켜야 할 것 같았죠. 그리고 초등학교 5학년 밖에 안 된 동생도 지켜야 할 것 같아서 자기는 무서워도 참고 동생을 위로하면서 엄마 말대로 공부 열심히 하려고 안간힘을 쓰며 집을 지기고 있었던 것이었어요.

역기능적으로 무너져 내린 가정으로서의 ‘집’을 현우가 말 그대로 ‘지키고’ 있었던 겁니다. 아직 만 열여섯밖에 안된 고등학교 1학년생 현우가 기둥처럼 그 가정을 지탱하고 있더란 말입니다. 저는 그 날 현우를 격려해 주면서 대화를 마치고는 곧바로 법원 아동상담위원께 현우의 상담을 맡겨서 치료와 다독임을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현우의 아빠와 엄마가 함께 만들어 낸, 정서 학대와 방임이 혼재된 처사는 분명 아동학대에 해당했지만, 그에 대해 형사적 처리를 하기 보다는 당해 가사사건 절차에서 직접 교육 및 상담 등을 통한 강도 높은 개입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현우가 바라는 것은 아빠와 엄마에 대한 사법처리가 아니라 ‘잘 대해주는 좋은 아빠’였고 ‘엄마와 떨어지지 않는 것’이었으니까요. 현우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엄마와 아빠가 평화롭고 따뜻하게 자신을 잘 돌봐주는 것이었고 설령 엄마와 아빠가 따로 살게 되더라도 평온하게 양쪽 모두와 유대관계를 유지하면서 돌봄과 사랑을 받는 것이었으니까요.

이를 위해 현우의 엄마와 아빠는 그 후 몇 달간 부모교육과 상담, 그리고 조정적 개입을 통해서 좀 더 아이들 중심의 이혼 갈등 해결, 즉 아이들을 보호하면서 두 분이 평화롭게 이혼하고 이혼 후 아이들에 대한 양육협력 관계를 잘 정립하기 위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현우 아빠가 이혼이라는 현실을 수용하기까지는 제법 시간이 필요했고 음주 습관도 쉽게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공감적이고 지지적인 조정위원을 통해서 결국은 원만하게 이혼을 하겠다는 마음을 먹게 되었어요. 그리고 현우 엄마 또한 이혼도 중요하지만 아이들을 보호하며 아이들의 복리에 부합하도록 이혼을 ‘잘 하는 것’ 역시 포기하지 않기로 마음을 단단히 먹게 되었지요.

무엇보다도 현우는 ‘다 큰’ 아이가 아니라 아직은 보호와 양육이 필요한 그냥 아이이기 때문에, 현우가 엄마, 아빠 노릇을 하게 하지 말고, 엄마와 아빠가 현우에게 부모 역할을 끝까지 잘해야 한다는 것에 결국은 두 분의 동의가 이루어졌어요. 그 결과 현우와 현미의 양육은 엄마가 하고 아빠는 양육비 지급 및 정기적인 면접교섭을 하기로 하는 합의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다행이었지요. 물론 그 ‘동의’에 이르기까지 부모교육과 상담적 개입을 위해 전문상담가였던 조정위원의 상당한 노고가 있었지만요. (이러한 절차의 구체적인 시스템은 법원이나 재판부마다 다르고, 특히 인력 등 자원이 갖춰져 있는지에 따라 크게 다릅니다.)

청소년기 내지 사춘기 아이들의 경우에, 현우처럼 부모의 갈등과 이혼으로 ‘애어른’이 되어 가정에서 어른으로서의 역할을 자처하는 아이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부모 모두에 대해 시니컬한 반응을 보이거나 반항적이 되는 아이, 아예 엇나가 가출이나 비행 등을 저지르는 아이도 있고요. 집중력이 떨어지고 공부에 흥미를 잃거나 좋아하던 활동도 시큰둥해 하는 아이, 심한 경우 우울이나 무력감이 깊은 상태로 침잠하는 아이 등 그 나타나는 양상은 다양한 것 같습니다.

다행인 것은, 아이들은 부모가 조금만 태도를 바꿔서 부모 역할을 잘 해 주고 아이들에게 상담 등의 전문적 도움을 주면 성인에 비해서 금방 좋아지는 경우를 많이 본다는 것이에요. 아이들이 금방 회복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신기하기까지 한데, 아이들은 아직 자라는 중에 있으니 그 자라나는 힘으로 상처나 문제도 쉽게 극복하는 것인가 싶기도 하고, 아이들 안에는 그 어떤 알 수 없는 각자 자신만의 고유한 신기한 힘이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어른으로서 그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참으로 경이롭고 신기해서 이젠 이혼 사건이 오면 아이들 먼저 살피게 되는 것이 아주 자연스러워졌습니다.

(사진 출처 = 게티이미지뱅크)
(사진 출처 = 게티이미지뱅크)

유엔 아동권리협약 일반논평 20호 ‘청소년기 아동 권리의 이행’에 의하면, 의존성과 자율성이 공존하는 독특한 시기인 청소년기는 쉽게 정의할 수 없고 아이마다 각기 다른 연령대에 나타난다고 합니다. 사춘기는 여자아이와 남자아이에게 다른 연령대에서 나타나고 각기 다른 뇌 기능은 다른 시기에 성숙해 진다고 하고요. 이 시기 아이들은 몸이 다 자라서 ‘다 큰’ 것처럼 보이지만 아직은 아이이니 여전히 부모가 부모 역할을 잘 해야 합니다. 뇌, 특히 인간의 가장 고도한 부분인 논리적, 추상적 사고 영역이 아직도 계속 자라고 있는 중이니까요.

위 일반논평에서는, 청소년의 회복력과 건강한 발달을 증진시키는 요소로 “그들의 삶의 주요 성인과의 강한 관계와 지원”을 첫 번째로 꼽더군요. 가장 주요한 성인은 말할 나위 없이 ‘부모’, 즉 엄마와 아빠가 최우선적이겠죠. 부모의 이혼으로 아이가 한쪽 부모와는 따로 살 수 밖에 없게 되더라도 따로 사는 부모와도 강력한 유대관계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부모로부터의 양육과 교육에 관계된 지원 역시 당연히 지속되어야 하구요.

남편이 볼 때 아내가 빵점이라거나 혹은 아내 입장에서 남편이 형편없다고 생각하더라도, 절대 잊어선 안 되는 것은 그 상대방이 내 소중한 아이에게는 결코 끊어 낼 수 없는 ‘중요한’ 어른으로서의 부모라는 사실입니다. 그런 엄마는 혹은 아빠는 ‘차라리 없는 게 나아’라는 생각은 넣어 두시고 그 상대 부모가 나에게는 부족한 배우자였지만 자녀에게는 대체불가능하고 존재 자체로 중요한 사람임을 인정하고 그와 협력적 양육 관계를 정립해 나가야 내 소중한 아이가 단단한 자존감과 정체성을 지닌 어른으로 잘 자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혼 부모가 사춘기 자녀를 둔 경우에, 아이들이 다 컸으니까 알아서 잘 지내겠거니 하는 식으로 방치해선 절대로 안 되고, 반드시 안정적인, 그러나 융통성 있는 면접교섭 일정을 짜야 합니다. 물론 아이들의 참여 기회를 충분히 주고 그들의 의견을 존중하면서 말이죠. 위 일반논평에서 청소년의 회복력과 건강한 발달을 증진시키는 요소로 두 번째로 꼽고 있는 것이 바로, “아이들의 참여 및 의사 결정 기회”이기도 하니까요.

이와 관련해서 한 가지 짚고 가야 할 것은, 아이의 의견을 존중할 때 매우 세심하고 사려 깊어야 한다는 것인데요. 앞서 현우의 사례에서도 보았듯이, 때론 아이의 표면적인 의견에만 천착하다 보면 아동의 최선의 이익(best interest of child) 내지 자녀의 복리(福利)에 부합하지 못하게 될 수 있으므로, 아이의 마음과 의사가 표현될 기회를 줄 때 우리는 이점을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현우의 경우, 자기는 ‘당연히’ 아빠랑 살아야 한다고 말했었거든요. 하지만 우리는 현우에 대한 상담과 그 부모에 대한 교육 및 조정 등을 거쳐서 현우의 의견은 존중하되 현우의 복리에 부합하는 양육세팅을 그와는 달리 했었지요. 현우(와 현미)의 양육자는 엄마로 하되 아빠는 양육비 지급과 정기적인 면접교섭을 통해 현우와의 긴밀한 유대관계를 유지하도록 함으로써 현우에게 안정적인 양육 환경을 제공하면서도 아빠를 사랑하는 현우의 마음을 충분히 보살필 수 있었어요. 이와 같이 ‘아동의 목소리가 들려질 권리의 보장 및 존중’과 ‘아동의 최선의 이익의 고려’ 간에는 주의 깊은 관계 설정이 필요합니다.

마지막으로, 엄마와 아빠를 사랑하는 이 땅의 모든 현우들이 가진 경이로운 내면의 힘에 찬사와 응원을 보냅니다. 그런 아름다운 모습을 잘 간직한 단단한 어른으로 아이들을 잘 키워내려고 애쓰시는 수많은 현우 엄마아빠들에게도 격려와 지지와 응원의 말씀을 드립니다.

임수희 부장판사는…
현재 수원지방·가정법원 안산지원에 재직 중이며 아동의 최상의 이익을 위해 면접교섭의 중요성 및 바람직한 방법을 안내하는 칼럼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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