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는 들었지만, 이렇게 핑크가 가득할 필요는 없었는데요.
요즘 SNS 곳곳에서 남성들이 핑크 가득한 옷을 입고 영화관을 향하는 장면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이 생각지도 못한 ‘핑크색의 향연’. 이들의 목적지는 바로 영화 ‘바비’ 상영관이었죠.
그레타 거윅의 감독의 신작 영화 ‘바비’가 북미 최고 오프닝을 경신하며 ‘신드롬’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핑크빛 에너지” 엄청난 환호와 감상평이 쏟아지고 있는데요.
하지만 마냥 ‘핑크빛’은 아닙니다. 남성 중심적 사고 등에 대한 노골적인 비판을 담았다며 평점 테러도 이어지고 있죠.
영화 ‘바비’, 마지막까지 ‘핑크빛’일 수 있을까요?
처음 출시된 1959년부터 35만 개가 팔려나가며 장난감 시장의 판도를 뒤흔든 바비. 전 세계 여자아이들 대부분이 ‘선물’로 꿈꾸는 인형이죠. 지금도 전 세계에서 해마다 5800만 개씩 팔려나가는 초대형 스테디셀러입니다.
영화 속 바비가 사는 ‘바비랜드’는 오로지 바비 인형만을 위한 세계인데요. 이곳은 대통령은 물론이고 우주비행사, 비행기 조종사, 대법관, 노벨상 수상자까지 온통 바비들 차지인 곳입니다.
그러나 바비의 남자친구 켄은 ‘그냥 켄’이죠. 바비가 바라봐주지 않으면 존재 의미가 없습니다. 예쁘고 똑똑한 바비들이 넘쳐나는 ‘바비랜드’에서 ‘켄’은 그저 배경과 조연일 뿐인데요.
미국 LA에 온 바비는 자신이 모든 여자아이에게 환영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데요. 완벽한 외모를 지닌 바비 때문에 굳어진 미의 기준과 이로 인해 여성들이 짊어져야 했던 부담을 이유로 공격을 받죠. 그런데 오히려 켄은 바비랜드에 없던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에 매혹되면서 현실 세계의 ‘가부장제’ 사회를 바비랜드로 옮기기 위해 애를 쓰게 됩니다.
하지만 결국 바비와 켄이 모두 평등한 ‘바비랜드’는 이루어지지 않는데요. 여성과 남성의 성별을 바꾼 불평등은 계속됩니다. 다만 켄은 “나는 나”라는 나름의 정체성을 찾게 되죠.
거윅 감독은 3일 내한 간담회에서 “바비는 스스로 완벽하다고 생각했지만, 점차 드러나는 완벽하지 않은 부분들이 자신을 인간답고 온전하게 만든다는 걸 깨닫게 된다”라고 이번 영화에 대한 이해를 당부하기도 했습니다.
영화 ‘바비’는 해외 비평 사이트 로튼토마토에서 프레시 인증 마크를 획득하며 2023년 절대 놓쳐선 안 될 작품으로 손꼽혔는데요. 심지어 같은 날 북미에서 개봉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오펜하이머’를 꺾고 북미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영화 ‘바비’는 개봉 첫날 오프닝 수익이 7080만 달러(한화 약 912억 원)를 기록하고, 개봉 첫 주말까지 1억 5500만 달러(한화 약 1997억 원)를 돌파하는 등 2023년 북미 최고 오프닝 스코어를 경신했는데요. 이는 올해 개봉한 영화 중 가장 많은 오프닝 스코어입니다. 기존 1위는 4월 개봉한 ‘슈퍼마리오 브라더스’로 1억4640만 달러(약 1882억 원)였죠.
거기다 영화 ‘바비’는 여성 감독 영화 사상 최대 개봉 주말 스코어라는 또 다른 새 기록을 썼는데요. 이는 ‘캡틴 마블’(감독 애너 보든, 라이언 플렉)의 2019년 1억 5340만 달러(한화 약 1970억 원), 2017년 ‘원더 우먼’(감독 패티 젠킨스)의 1억 300만 달러(한화 약 1323억 원)를 넘어선 기록입니다.
하지만 국내 반응은 사뭇 다른데요. 23일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에 따르면 영화 ‘바비’는 겨우 20만 관객을 넘었었습니다. 개봉 전 주연배우 마고 로비 등이 대규모 내한행사를 진행하며 시선 끌기에 나선 것에 비해 성적이 초라하죠.
특히 일본 애니메이션 ‘명탐정코난: 흑철의 어영’이 영화 ‘바비’를 제치고 22일까지 이틀째 박스오피스 3위를 유지하며 28만 명이 넘는 관객을 모은 부분과 대조됩니다.
골든 에그 지수 역시 87%를 기록하며 호러 ‘인시디어스: 빨간 문’에 이어 상영작 중 두 번째로 낮은 점수를 받았죠.
이는 남녀 관객의 평가가 극명히 갈리며 벌어진 모습인데요. 바비 인형을 기반으로 가부장제와 남성 중심적 사고 등에 대한 노골적인 비판을 담아 남성 관객들이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남성 커뮤니티에서는 영화 ‘바비’는 양성평등이 아닌 여성우월주의를 외치는 영화라며 비난했고, 이에 여성 커뮤니티에서 반박하며 ‘젠더 논쟁’까지 벌어졌죠.
실제로 네이버 영화 평점에 따르면 여성 관객은 평균 9.38점(10점 만점)을 준 데 반해 남성 관객의 평균은 5.99점이었는데요. 심지어 여성과 남성 관객의 비율이 각각 81%와 19%(CGV 관객 분석)로 상영 중인 영화 중 가장 극명하게 나뉘었습니다.
반면, 미국에서는 영화 ‘바비’의 인기가 남성들에게 ‘핑크’를 입히고 있는데요. 틱톡 등 SNS에는 남성들이 핑크 음료를 마신 뒤 갑자기 핑크색 옷을 입은 ‘바비’로 변신하는 챌린지가 인기를 끌고 있죠.
미국 인사이더는 “‘핑크 음료’를 마시고 난 뒤 예뻐졌다”라는 농담이 퍼지면서 이 같은 챌린지가 생겨났다고 봤는데요. 남성들은 의상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파란색이었던 자신의 차가 핑크색으로 바뀌기도 하고, 금발 가발에 핑크색 롤러스케이트를 신은 모습으로 변신하기도 했죠.
남성들이 핑크색 옷을 입고 영화를 보러 가는 모습들을 인스타그램에 인증하는 유행까지 불었는데요. 그야말로 핑크가 가득한 세상이죠.
패션업계도 ‘바비코어’를 입었는데요. 이는 여성과 남성을 가리지 않았죠. 각기 브랜드들이 ‘핑크 아이템’을 메인으로 내세웠는데요.
LF의 ‘빠투’ 브랜드가 6월 출시한 핑크 의상이 다른 색상 대비 판매율이 2배 이상 높았고요. 패션 플랫폼 ‘29CM’에 따르면 남성 패션 브랜드조차 핑크 색상을 활용한 상품을 이번 여름 주요 제품으로 내걸었습니다.
극명한 평가. 그래도 영화 ‘바비’가 우리에게 준 긍정적인 메시지는 ‘우린 모두 완벽하지 않다’, 나 자신을 깨달아 가는 과정이라는 점인데요. 갈등이 아닌 ‘핑크빛 에너지’로 기억되는 영화 ‘바비’가 될지, 관객들의 평가는 지금도 더해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