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처음 의사 면허를 발급받은 의사 7명의 이름과 얼굴이 재확인되고, 당시의 의료 현장을 공개한 ‘올리버 R. 에비슨 자료집Ⅵ - 한국의 첫 면허 의사 배출’이 발간됐다.
우리나라 최초의 면허 의사는 1908년 세브란스병원 의학교에서 배출됐다. 1909년 조선통감부가 펴낸 ‘한국시정연보’에 따르면 당대에 자신을 의사라 칭하며 의료업에 종사하던 조선인은 2600여 명에 달했지만, 이들 모두가 공인받은 것은 아니어서 세브란스병원 의학교의 면허 의사 배출을 ‘좋은 일’이라고 기재했다.
7명의 졸업생은 졸업식 다음 날 대한제국 내부 위생국으로부터 한국 의사 면허의 효시가 된 의술개업인허장 1~7번을 발급받았다.
의학 전문성을 인정받은 조선인 의사의 탄생에는 캐나다 선교사 올리버 R. 에비슨(Oliver R. Avison)의 역할이 가장 컸다. 캐나다 토론토에서 의사이자 의과대학 교수로서 안정된 삶을 살던 에비슨 박사는 ‘환자가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을 의사의 사명’으로 생각하고 1893년 의료 선교사로 조선에 처음 왔다.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고종의 옻 중독을 치료해 왕실 의사가 됐고,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제중원의 운영을 맡으며 병실과 수술실을 만들어 환자 치료의 기반을 마련했다.
병원 시설과 운영 시스템을 마련한 에비슨 박사는 조선인들이 서양 의사의 도움 없이 스스로를 치료하는 데에 이르길 원했다. 마침 미국 의료 선교사 제시 W. 허스트(Jesse W. Hirst)가 조선에 들어와 제중원(세브란스병원)의 업무를 도우면서 에비슨 박사는 치료보다 조선인 의학 교육에 전념할 수 있게 됐다.
당시 세브란스병원 의학교를 다니던 박서양을 비롯해 학생이 대부분이 영어와 기초 과학에 익숙하지 않았다. 이에 에비슨 박사는 김필순과 함께 의학 교과서를 국문으로 번역해 출판했다. 우리나라 최초 면허 의사 탄생의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세브란스병원 의학교 1회 졸업생 7명 전원은 에비슨 박사의 뜻을 이어 다시 조선인 의사 양성에 힘쓰고 일부는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등 우리나라 근대 의학을 넘어 자주독립 국가 건설의 성장을 견인했다.
특히 이번 자료집은 졸업생의 7명이 찍은 사진 속 인물 이름을 정정한 데에 큰 의미가 있다. 기존에는 가운뎃줄 맨 왼쪽 인물이 주현칙, 아랫줄 오른쪽 인물이 홍종은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이 두 인물의 이름이 서로 바뀌었던 것을 밝혀냈다.
에비슨 박사는 앞서 미국의 대부호 루이스 H. 세브란스(Louis H. Severance)씨의 후원을 끌어내 세브란스병원 설립에도 큰 공헌을 했는데, 이번 자료집에서는 당시 병원 운영 상황도 알 수 있다.
병원은 환자들이 냉온수를 모두 사용할 수 있었고, 전기 조명을 사용할 만큼 쾌적했다. 병실과 수술실 운영도 현대적이었다. 병실은 개인 특실, 2~3명이 수용되는 반특실, 그 이상의 일반병실이 있었다. 수술실에는 무균법을 엄격하게 적용하는 등 당시 열악한 의료 환경을 보완할 수 있는 병원 환경 조성에 힘썼다.
그 외에도 개 물림 사고가 잦던 당대 우리나라 상황을 반영해 광견병 접종과를 운영하고, 병원에 올 수 없는 환자들을 위한 왕진도 제공하는 등 환자 편의를 제고했다.
편역을 맡은 박형우 객원교수는 “이번 자료집에는 한국 의학 교육의 출발점을 알 수 있는 역사적 사료를 한데 모았다”라며 “에비슨 박사를 중심으로 세브란스병원 의학교가 배출한 우리나라 최초의 면허 의사들이 공부했던 국문 교과서와 당시 병원 운영 현황을 생동감 있게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