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3월에 있었던 일이다. 중소기업 정책에 대한‘국민과 함께 하는 업무보고’에서 고(故)노무현 대통령은 이렇게 얘기했다.
“우리가 수요자 중심의 정책이라고 말은 하는데 실제로 하다보면 아무래도 정책하는 사람 생각 중심으로 가기가 쉽습니다. 그동안 수요자 중심 정책을 해보자 많은 노력을 했는데, 실제로 수요자 앞에서 그럴듯하다 평가를 받을 수 있는지 시험 치는 날입니다.”
정책 입안자들의 행정편의주의, 쉽게 말해 공무원들이 본인들 편하게 일하기 위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들은 하루 이틀 얘기가 아니다. 그런데 국가 수반인 대통령의 입에서 저렇게 솔직하게 얘기 하는 것은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도 흔치 않은 일이다.
얼마 전 정부가 코로나19의 종식을 선언했다. 여전히 확진자는 나오고 있지만 실내 마스크 해제 시점부터 대부분 엔데믹(풍토병)에 동의하는 분위기가 확산됐다.
코로나19와 가장 친밀(?)한 잣대가 된 금융권의 분위기는 요즘 심상치 않다. 이른바 코로나19 청구서, 펜데믹(전세계 대유행)의 공포에 휩쓸린 정부가 마구 쏟아 놓은 응급처방들에 대한 영수증이 날아들고 있어서다.
제일 위험해 보이는 것은 제일 안전하게 느껴지는 은행이다. 5대 시중은행의 지난달 대출 연체율이 말해준다. 코로나19로 돈을 빌려간 차주는 주로 영세한 사업자들이다.
그동안은 원리금도 유예해주고 대출 상환도 미뤄줬다. 만기연장도 2025년 9월까지 자율협약에 의해 연장이 가능하도록 해놨다. 문제는 상환유예다. 9월 ‘산소호흡기’가 종료되면 이제 돈을 갚아야 한다. 설상가상 지난해 금리가 가파르게 뛰었다. 대규모 대출 부실폭탄이 터질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코로나19는 끝난 것이 아니다. 아직까지 입은 상처에 새살이 돋기 까지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한 계층도 있다. 공무원, 정치인, 고위 관료들은 “언제까지 코로나19 타령 할 것이냐”는 소릴 할 수 도 있겠지만 더 디테일하게, 더 세세히 그들의 처지를 들여다 봐야 한다.
한쪽의 일방적인 통계라는 점을 감안하고 봐야겠지만, 소상공인연합회가 얼마 전 내놓은 자료를 보면 소상공인 중 63.4%가 1년 전과 비교해 부채액이 늘었다고 답했다. 부채가 증가한 이유로는 매출·수입 동반 하락(41%), 매출 하락(37%)이 주로 언급됐다.
지난해 영업이익이 적자라는 응답은 36.2%에 달했다. 월평균 영업이익은 100만~200만 원(17.4%), 100만 원 미만(13.7%)이었다. 월평균 100만 원도 벌지 못하는 소상공인이 절반(49.9%)이나 되는 것이다. 연매출로는 소상공인 중 56.6%가 1억2000만 원보다 적게 벌어들인다고 응답했다. 빚은 5000만~1억 원(27.6%)이 가장 많았다. 2억 원 이상도 15%나 됐다.
그렇다면 은행들이 오로지 이런 부담을 모조리 짊어져야 한다는 답이 나온다. 정말 그래야 하는 걸까?
정부가 대안으로 내놓은 새출발기금을 보자. 물론 이용률은 저조하다. 이 제도는 일종의 채무탕감 방식이기 때문에 이용할 경우 금융활동에 일정 부분 제약을 받는다. 소상공인들은 모두 개인 사업자들이기 때문에 선택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수요자들에게 외면받는건 이유다.
지난 23일은 노 전 대통령 서거 14주기였다. 정책을 수요자 중심으로 만들려고 노력했지만 솔직히 쉽지 않았다는 그의 솔직한 말은 지금의 정부에 비춰도 크게 틀리지 않아 보인다.
언제까지 상환연장으로 버틸 수 없다. 빚을 갚아야할 대출자들도 문제지만, 은행의 부실도 문제기 때문이다. 정부가 고민해야 할 것은 일차원적인 채무탕감이나 갚는 기간을 늘려 주는 게 아닌 소상공인들에 대한 실질적인 비용절감 방안이다. 상반기 내내 한국경제를 위협해온 전기·가스요금 인상은 하반기 본격적으로 부담이 될 가능성이 높다.
9월 이후 대출 상환까지 소상공인들을 덮친다면 어떤 사태가 밀어닥칠지 가늠키 어렵다. 정책은 수요자들 입장에서 만들어야 한다는 노 전 대통령의 생전 지적을 다시 한번 떠올려 봐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