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관식에만 1700억?…영국, 왕실 없애지 못하는 이유 [이슈크래커]

입력 2023-05-08 16:30 수정 2023-05-08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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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3세 영국 국왕. (AFP/연합뉴스)
▲찰스 3세 영국 국왕. (AFP/연합뉴스)
영국에서 70년 만의 초대형 이벤트가 열렸습니다. 6일(현지시간) 찰스 3세 국왕이 대관식을 치르고 영국과 14개 영연방 국가의 군주임을 공식 선포한 겁니다.

이날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진행된 찰스 3세의 대관식은 영국 국교회 최고위 성직자인 저스틴 웰비 캔터베리 대주교가 집전했습니다. 찰스 3세는 서약에서 “하느님의 이름으로, 그의 본보기로서 나는 섬김받지 않고 섬길 것”이라며 “모든 믿음과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자유롭게 살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죠.

대주교는 국왕의 머리·가슴·손에 성유를 발라줬고, 이 과정은 가장 신성한 순간으로 여겨져 장막으로 가려진 채 진행됐습니다. 이후 캔터베리 대주교는 찰스 3세의 머리 위에 왕관을 얹었죠. 수도원 종소리와 트럼펫 소리가 사원 내부에 울려 퍼졌고, 동시에 영국 전역에서 예포가 발사됐습니다.

이번 대관식은 1953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대관식 이후 70년 만에 치러졌습니다. 찰스 3세가 왕세자로 책봉된 이후로는 65년 만이죠. 찰스 3세는 엘리자베스 2세와 필립 공의 장남으로 태어나 9세 때 왕세자에 올랐지만, 엘리자베스 2세가 역대 최장기간인 70년간 즉위하면서 역시 최장기 왕세자 기록을 세운 바 있습니다. 지난해 9월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서거 직후 왕위를 계승했고, 8개월간의 준비 끝에 왕관을 쓰게 됐습니다.

대관식이 1000년의 전통을 이어온 만큼, 전 세계 매체는 생중계에 나서며 대관식을 중계했습니다. 비가 오는 궂은 날씨에도 수많은 인파가 거리로 나와 대관식을 지켜봤죠. 이날 뉴욕타임스(NYT)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비를 맞으며 대관식을 지켜보기 위해 거리에 줄지어 서 있었다”며 많은 사람이 영국 국기를 흔들며 환호했다고 전했습니다. 특히 대관식이 끝난 뒤 버킹엄궁으로 복귀하는 찰스 3세 부부가 260년 된 ‘황금마차’(Gold State Coach)를 타고 등장하자 환호가 이어졌다는 전언입니다.

그러나 같은 시각, 거리 한편에서는 ‘군주제 반대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현지 매체들의 보도에 따르면 일부 관람객들은 찰스 3세의 행렬을 향해 야유하며 “내 왕이 아니다”(Not My King)라는 문구가 적힌 현수막을 흔들었다고 하는데요. 무려 70년 만에 열린 초대형 이벤트에 야유가 쏟아졌던 이유는 뭘까요?

▲대관식 향하는 찰스 3세 영국 국왕 부부. (로이터/연합뉴스)
▲대관식 향하는 찰스 3세 영국 국왕 부부. (로이터/연합뉴스)
1700억 달하는 대관식 비용…‘군주제 폐지’ 목소리 커져

실로 영국의 젊은 층 사이에서는 왕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확산하고 있습니다. 지난달 유고브가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영국 성인 가운데 군주제에 대해 우호적으로 답한 응답자는 53%였지만, 18~24세 젊은 층으로 좁히면 긍정 답변은 26%에 그쳤습니다. 4년 전 실시된 같은 조사에서 군주제를 우호적으로 바라보는 젊은 층 여론은 48%였죠.

이날 대관식 곳곳에서는 전통과 현대의 조화를 시도한 노력이 발견됐습니다. 찰스 3세가 앉은 떡갈나무 왕좌 아래에는 700년 전 스코틀랜드 왕정을 상징하는 ‘운명의 돌’을 깔았고, 처음으로 여성 사제가 성경을 낭독했습니다. 여당인 보수당의 하원 원내대표 페니 모돈트 추밀원 의장은 2시간 가까이 진행된 대관식에서 길이 1.21m에 무게 3.6㎏짜리 보검을 굳건하게 들고 있는 모습으로 눈길을 사로잡았는데요. 이 보검을 여성이 든 것도 이번이 처음입니다. 또 불교·유대교·시크교도 지도자를 초청하면서 다양성을 강조했죠.

이 같은 노력에도 “나의 왕이 아니다”라고 적힌 노란색 플래카드는 거리 곳곳에 등장했습니다. 군주제에 반대하는 이들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도착하는 찰스 3세와 커밀라 왕비에게 야유를 보내기도 했죠. 엘리자베스 2세 때는 볼 수 없었던 풍경입니다. 가디언에 따르면 이날 오전 왕의 행렬이 시작되기 전 반군주제 단체 리퍼블릭(Republic) 회원 등 52명이 대관식 관련 소란 행위, 공공질서 위반, 치안 방해, 공공 방해 모의 등의 혐의로 런던 경찰에 체포됐다고 합니다.

왕실 측은 ‘간소화’와 ‘다양성’을 내세워 현대에 맞춘 왕실의 품격을 보여줬다고 자평합니다. 이번 대관식이 70년 전보다 조촐하게 구성된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비난여론을 피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NYT에 따르면 그 비용은 최소 1억 파운드, 한화로는 약 1670억 원으로 추정됩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 대관식 비용을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5600만 파운드(약 936억 원)인데, 약 2배에 달하는 비용이 들어간 겁니다. ‘세금 낭비’라는 쓴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죠.

이번 대관식 비용이 논란된 바와 같이, 영국 내부에서는 유지 경비 때문에 왕실 폐지론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습니다. 왕실 교부금(Sovereign Grant)이라는 이름으로 왕실이 영국 정부로부터 받는 예산은 2021~2022년 1억240만 파운드(한화 약 1710억 원)였습니다. 국가 재정은 빠듯한데, 막대한 세금으로 왕실이 운영된다는 겁니다.

이와 함께 왕실의 세습 부동산 자산에 대한 배당금이 영국 재정 당국에 귀속되지 않고, 사유재산으로 들어간다는 점에도 문제가 제기됩니다. 국왕은 상속세와 법인세를 내지 않는다는 특혜도 의문을 부르죠. 영국 정부는 왕실의 면세 이유에 대해 2012년 “제도로서 왕실은 전통적인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충분한 개인 자원이 필요하며, 일정 정도 정부로부터 재정적 독립이 필요하다”고 설명한 바 있습니다.

▲고(故) 엘리자베스 2세 여왕. (AP/뉴시스)
▲고(故) 엘리자베스 2세 여왕. (AP/뉴시스)
“영국 왕실 브랜드 가치? 글로벌 기업 수준”…왕실 유지론도 팽팽

왕실 유지를 주장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습니다.

유고브가 최근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군주제 유지에 대한 영국 시민의 지지율은 62%로, 여전히 과반이 넘는 것으로 집계됩니다. 젊은 층 사이에서 왕실 존재 여부를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추세가 늘어나고 있긴 하지만, 왕실 유지를 주장하는 의견도 다수라는 거죠.

‘국민 통합’은 왕실의 순기능을 논할 때 빠지지 않는 키워드입니다. 왕이 직접 통치하진 않지만, 갈등을 완화하고 국민의 단결을 끌어내는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한다는 건데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제2차 세계대전 후 격동기에 즉위해 재위 70년간 코로나19 등 위기 때마다 국민을 위로하는 데 앞장섰다는 평을 받습니다.

여기에 왕실이 쓰는 돈보다 벌어들이는 비용이 많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브랜드 평가 전문기관 브랜드 파이낸스는 왕실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력이나 이득이 왕실의 운영비를 훨씬 뛰어넘는다고 2017년 밝힌 바 있는데요.

당시 브랜드 파이낸스는 영국의 브랜드 가치가 675억 파운드(한화 약 112조 원)에 달한다고 조사했습니다. 이는 당시 구글, 애플, 아마존 같은 글로벌 기업들을 뒤쫓는 수치입니다. 미국 경제지 포브스는 영국 왕실의 브랜드 가치를 190억 파운드(한화 약 31조7000억 원)로 추정하기도 했습니다. 왕실 가치가 글로벌 기업 수준이라는 겁니다.

▲6일(현지시간) “내 왕이 아니다”라는 문구가 적힌 플랜카드를 들고 시위 중인 관람객들. (AFP/연합뉴스)
▲6일(현지시간) “내 왕이 아니다”라는 문구가 적힌 플랜카드를 들고 시위 중인 관람객들. (AFP/연합뉴스)
찰스 3세, 엘리자베스 2세 이어 ‘스타’ 될까…숱한 과제 끌어안고 즉위

영국 왕실의 명성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찰스 3세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합니다. 하지만 찬란했던 엘리자베스 2세의 명성에 비하면 찰스 3세의 인기는 초라한 수준입니다. 군주제에 대한 영국인들의 지지율이 점차 떨어지고 있는 터라, 왕실 측에도 일찍이 비상등이 켜졌죠.

CNN방송이 여론조사 기업 사반타와 18세 이상 영국 성인 2093명을 설문해 5일 발표한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3분의 1 이상인 36%가 왕실 가족에 대한 의견이 10년 전보다 ‘부정적으로 변했다’고 답했습니다. 엘리자베스 2세는 말년에도 70% 이상의 지지율을 기록했는데, 찰스 3세 지지율은 집권 초기 3개월간 55%에 그쳤습니다. 왕실에 대한 시민들의 호감도가 하락하는 상황에서, 찰스 3세는 현시점에 걸맞은 왕실을 보여줘야 한다는 과제를 수행해야 합니다.

집안 문제도 골칫거리로 남아 있습니다. 앞서 찰스 3세의 차남인 해리 왕자는 2020년 1월 왕실의 인종차별을 주장하며 왕실과의 결별을 선언, 미국으로 떠난 바 있죠. 해리 왕자는 이번 대관식에 참석했지만, 인종차별 사건의 주인공이었던 부인 메건 마클과 아들 아치, 딸 릴리벳은 아치의 생일이 대관식과 같다는 이유로 불참했습니다. 해리 왕자는 자서전과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등을 통해 영국 왕실에 대한 폭로를 이어왔고, 아버지인 찰스 3세, 형 윌리엄 왕세자와 갈등을 빚고 있습니다. 또 찰스 3세의 동생 앤드루 왕자는 미성년자 성추행 의혹에 휩싸이며 2020년 이후 왕실의 모든 직위에서 물러난 바 있죠. 찰스 3세는 가족 내 그치지 않는 잡음을 다스려야 하는 상황입니다.

영연방 14개 국가와의 결속력도 다져야 합니다.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파푸아뉴기니, 자메이카, 앤티가 바부다, 바하마, 벨리즈 등 영연방 내 12개 국가의 원주민 지도자들은 4일 찰스 3세에게 서한을 보내 식민 지배에 대한 공식적인 사과와 왕실 재산을 이용한 배상을 촉구했습니다.

여기에 스코틀랜드 집권당은 찰스 3세의 즉위와는 별개로 독립을 재추진할 것이라는 계획을 밝혔고, 북아일랜드에서도 아일랜드와의 통일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연일 커지고 있습니다. 이로써 찰스 3세는 즉위와 동시에 군주제 반대 국민과 영연방 국가를 설득하고, 스코틀랜드와 북아일랜드 민심까지 달래야 하는 복잡한 상황에 처하게 됐습니다.

일찍이 세금 낭비 비판과 젊은 층의 무관심까지 짊어지면서 고심하게 된 찰스 3세. 그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뒤를 이어 영국의 ‘대형 스타’로 자리 잡을 수 있을까요? 영국 역사상 가장 오랜 세월 왕위 계승을 기다려왔던 그의 행보에 귀추가 주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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