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8월 바이든 행정부 주도로 초당적 지지를 받아 연방의회를 통과한 반도체법(The CHIPS and Science Act)은 미국 내 반도체 산업을 육성하겠다는 목적을 갖고 있다. 이제까지 반도체 설계 부분만 주도하고 생산은 다른 나라에 넘겼던 미국이 반도체 생산 전 공정을 스스로 하겠다는 의도의 산물이다. 반도체법은 같은 시기에 통과된 인플레이션 감축법(Inflation Reduction Act)과 더불어 바이든 행정부의 기념비적인 입법 성과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러한 미국 국내에서의 평가와 달리 한국을 위시한 다른 동맹국에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들린다.
특히 문제가 되는 내용은 최근 미국 상무부(Department of Commerce)에서 발표한 반도체법 시행세칙의 보조금 심사 기준이다. 이 심사 기준에 따르면 미국 연방정부의 반도체 산업 육성 보조금을 받는 기업은 몇 가지 까다로운 조건을 만족시켜야 한다. 핵심적인 내용은 중국을 비롯한 미국의 국가 이익을 침해할 가능성이 있는 국가에서 첨단 반도체 시설을 새로 짓거나 확장하는 사업을 향후 10년간 제한한다는 조건이다. 또한 보조금을 받은 기업은 그것을 배당이나 자사주 매입에 사용해서는 안 된다. 더 나아가 예상 수익을 초과하는 경우 보조금의 일부를 미국 연방정부가 환수한다는 조항도 있다. 이러한 까다로운 조항 때문에 중국에 대규모 반도체 생산 공장을 운영 중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노심초사할 수밖에 없다. 그나마 기존 설비 운영에 필요한 업그레이드와 장비 교체를 위한 투자에는 제한을 두지 않아 한숨을 돌릴 뿐이다.
여기까지 보면 미국이 지나칠 정도로 자국의 이익을 앞세운다는 인상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 트럼프 행정부의 보호주의적 무역정책과 바이든 행정부의 무역정책에 무슨 차이가 있느냐는 지적도 타당하다. 이렇게 미국이 다자적 자유무역 체제를 버리고 자국우선주의로 회귀하기 때문에 소위 가치동맹이라는 것은 허상에 불과하다는 주장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보조금 심사 기준을 더 자세히 살펴보면 바이든 행정부가 지향하는 가치를 확인할 수 있다. 연방정부 보조금을 받는 기업은 공장 건설 노동자와 직원을 위한 보육시설과 프로그램을 갖추어야 한다. 여성과 소외계층의 노동 참여를 기업이 직접 챙기라는 말이다. 그리고 연방정부 법과 규정에 따라 공장 건설 노동자들의 임금 수준을 맞추어야 하고, 단체교섭을 위한 노동조합을 설립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내용도 있다. 덧붙여 기업의 친환경적 공장 운영 및 여성을 비롯한 인종 및 다른 사회소수자의 고용 수준까지 살펴보겠다고 한다. 이런 내용 때문에 자유주의 시장경제를 지지하는 보수 세력은 반도체법이 ‘산업정책의 탈을 쓴 사회정책(industrial social policy)’이라고 빈정대고 있다.
바이든 행정부는 왜 산업정책에 사회소수자의 권익 보호라는 이질적인 내용을 섞는 것일까? 아마도 2024년 재선 전략의 일환일 것이다. 바이든 행정부는 전문가들의 예상과 달리 정상적인 입법 과정을 통해 인프라, 환경과 에너지, 그리고 제조업 관련된 공약을 성공적으로 이행하였다. 하지만 교육, 보육, 사회보장제도 관련 공약은 아직까지 지키지 못했다. 2022년 중간선거 결과 공화당이 연방하원의 다수당을 차지함에 따라 굵직한 입법이 올해와 내년에 가능할 것 같지도 않다. 바이든 대통령의 재선을 위해서는 민주당 핵심 지지 세력인 여성, 노동자, 그리고 인종 소수자의 도움이 필요하다. 바이든 행정부가 내세운 ‘중산층을 위한 외교정책’의 긍정적 효과를 유권자들이 체험하게 하려면 산업정책에 사회정책을 접목시킬 수밖에 없다.
미국의 자국우선주의 때문에 가치동맹 개념이 공허하다는 주장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지향하는 민주주의라는 가치는 공허할 수 있다. 하지만 바이든 행정부는 분명한 가치를 지향하고 있다. 노동자, 여성, 인종 소수자의 권익 보호가 그것이다. 이러한 가치를 공유하는 나라와 기업은 바이든 행정부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것이다. 이러한 가치를 공유하지 않는다면 내년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이 집권하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 하지만 2024년에 민주당이 정권 재창출에 성공한다면 적어도 2028년까지 ‘산업정책의 탈을 쓴 사회정책’은 지속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신중한 판단과 선택이 필요한 지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