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동맹은 그런데 연루와 방기의 위험을 동시에 내포한다. 강대국이 적국에 대해 강경대응으로 일관할 경우 비강대국은 원하지 않지만 여기에 끌려들어간다(연루). 반대로 강대국이 적국과 일방적으로 협상을 타결하면 약소국은 버림받았다고 생각한다(방기).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할 가능성이 높은 가운데 유럽연합(EU) 회원국 가운데 이탈리아에서 연루 위험을 피하고자 하는 조짐이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
내년 독일 경제, 최악의 경우 -7.5% 예상
‘내년도 경제는 최상의 경우 -0.4%, 최악은 -7.5%를 기록할 것이다.’
최근 독일의 민간경제연구소들이 합동으로 내년도 경제전망을 발표했다. 참 암울하다. 올겨울 날씨가 예년보다 추울 경우 가스가 부족해져서 가정이나 기업으로의 가스 배급이 불가피하다고 예상했다. 최악의 경우인데 이때 독일 경제는 내년 -7.5%, 2024년에는 겨우 플러스 성장세로 돌아설 것으로 봤다. 이코노미스트지도 올겨울은 독일을 비롯한 EU 회원국들이 가스를 비축해 그런대로 견디겠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하면 내년 겨울이 더 혹독할 것으로 전망했다. 독일은 EU 27개 회원국 경제의 20%를 차지하는 최대 경제대국이다. 독일의 경기침체는 곧바로 EU 경제를 끌어내린다.
독일은 현재 중도좌파의 사회민주당(사민당)이 같은 이념 성향의 녹색당, 그리고 친기업적인 자유민주당과 3당 연립정부를 구성해 운영 중이다. 이 가운데 녹색당이 대(對)러 강경정책을 유지 중이며 정당 지지도가 제1여당 사민당보다 높다.
하지만 구동독 지역 브란덴부르크주의 슈베트(Schwedt)시에 있는 정유공장은 당장 올 연말부터 가동이 중단된다. 60년 넘게 러시아의 원유를 수입해 운영하던 이 공장은 러시아산 원유의 수입금지 조치가 발효되면 공장을 가동하지 못한다. 정부는 다른 원유를 수입해 가동하게 해준다고 하지만 쉽지 않다. 이 지역의 국회의원을 중심으로 시민들이 정부에 대책을 요구했지만 속시원한 해결책이 아직 나오지 않았다.
문제는 내년 경제가 최악의 시나리오로 갈 경우 독일 유권자들이 얼마나 인내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아직까지 독일인 3분의 2 정도는 에너지 요금이 올라도 우크라이나 지원을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에너지 요금의 폭등이 지속되고 100만 명 넘게 수용한 우크라이나 난민의 배분 갈등이 독일 여러 주 간에 계속된다면 이런 지지 여론도 변할 수 있다.
우파연정이 들어설 이탈리아, EU의 ‘약한 고리’
지난달 25일 이탈리아 총선에서 극우파인 이탈리아형제당이 26% 지지를 얻어 제1당이 되었다. 현재 반이민과 반유럽을 앞세운 동맹, 부동산과 미디어재벌이자 전 총리인 베를루스코니가 이끄는 전진이탈리아당이 연정 구성을 협상 중이다. 이달 말에 연정이 구성되고 이변이 없는 한 이탈리아형제당의 조르자 멜로니가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될 듯하다.
3당은 선거공약으로 대규모 감세와 복지혜택 확대를 내세웠다. 10만 유로, 약 1억4000여만 원 연봉자의 최고 세율을 폐기해 15% 단일 세율을 적용한다. 일부 직종의 퇴직 연령도 낮추고 최저 연금수령액과 아동수당 증액을 약속했다. 이런 정책은 경제성장이 세수 축소를 만회하리라고 예상한다. 하지만 최근 영국은 대규모 감세를 발표했다가 파운드화 가치의 폭락과 국채 금리 급등을 겪었다.
멜로니는 지난달 말 총선 후 첫 공식행사인 농업박람회에 참석해 “동맹국과의 연대보다 이탈리아 국익을 먼저 생각하겠다”고 포문을 열었다. 8월 물가상승률은 8.9%, 에너지요금은 연초보다 3배 정도 올랐다. 신임 총리는 유권자들에게 대규모 지원을 약속했지만 이럴 경우 EU와의 갈등이 커질 수밖에 없다. EU는 팬데믹으로 어려움에 처한 회원국을 지원하려고 7500억 유로(약 1000조 원)의 기금을 조성했고 이탈리아는 이 가운데 2000억 유로 정도를 지원받는 최대 수혜국이다. 그러나 이 기금은 기후변화와 디지털 전환 등 정해진 목적에만 지출돼야 하는데 이탈리아는 이 기금을 두고 EU와 갈등을 벌일 태세다.(자세한 내용은 8월 11일자 유러피언 드림 23.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퍼펙트 스톰’ 참조)
유럽외교협회(ECFR)가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이탈리아인들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평화에 가장 큰 장애물로 러시아라고 답한 시민이 39%, 우크라이나와 EU, 미국으로 답한 시민이 35%로, 4%포인트 차이에 불과했다. 27개 회원국 가운데 우크라이나와 EU, 미국이 평화에 장애라는 비율이 가장 높다. 이런 상황에서 러시아의 가스 공급이 끊기고 물가가 계속해서 폭등하는데 신임 정부가 약속한 과감한 재정투입이 어려워진다면 이탈리아 유권자들의 인내도 폭발할 가능성이 높다. 이탈리아 경제는 EU 회원국 가운데 세 번째 규모다. 미국이 주도하는 대러시아 강경정책에 더 이상 연루되지 않겠다는 정책이 이탈리아에서 먼저 돌출할 수 있다. 이런 연루의 탈피가 시작은 어려워도 한 번 일어나면 이탈리아에서만 그치는 게 아니라 독일 등 다른 주요 회원국에서도 얼마든지 반복될 수 있다.
美 공화당 하원 다수당 땐 대러 정책 비판 커질 듯
미국에서는 다음달 8일 중간선거가 치러진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현재 집권 민주당과 야당인 공화당이 백중세다. 그러나 공화당이 하원에서 다수당이 된다면 일부 트럼프 지지자들이 의회에 진출해 대러시아 정책을 비판할 가능성이 높다. 미국은 전쟁 직후부터 대러시아 강경정책을 주도해왔고 이제까지 우크라이나에 152억 달러가 넘는 무기와 경제 지원을 해왔다. EU 27개 회원국은 미국의 제재정책을 지지하고 실행해왔다. 그럼에도 유럽 일부 국가에서 드러내놓고 말을 못 하지만 미국에 대한 불만이 있다.
대러시아 제재로 가장 큰 경제적 손실을 감내하는 곳은 EU 회원국, 특히 독일이다. 러시아로부터 가스의 절반, 원유의 30% 정도를 수입해 오다가 이게 점점 줄어들었다. 반면에 미국은 셰일혁명으로 가스와 원유를 더 이상 중동에 의존하지 않게 됐다. 미국 경제는 내년에도 0.3% 성장이 예상된다. 또 이번 전쟁으로 EU는 해저 파이프라인을 통해 러시아산 천연가스 수입이 사실상 어려워졌는데, 미국 액화천연가스(LNG) 업체가 반사이익을 톡톡히 누리고 있다. 이전에는 유럽 시장 진출이 어려웠는데 러시아 수입이 막히면서 유럽은 미국 LNG에 점점 더 의존할 수밖에 없다.
유럽의 이탈, 美 공화 고립주의 만나면 최악의 시나리오
외교는 가치와 이익의 적절한 접점을 찾는 과정이다. 아직까지 유럽은 침략자 푸틴을 응징해야 한다는 가치를 우선해왔다.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하고 올해 추운 겨울을 거치면서 가치가 후퇴하고 이익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질 것이다. 이탈리아와 독일 등에서 미국과의 대러시아 단일 대오에서 이탈하는, 연루를 피하려는 움직임이 드러날 수 있다. 최악의 시나리오는 이런 움직임이 미국 공화당의 고립주의와 결합할 경우다.
이래저래 우크라이나 전쟁이 앞으로 세계경제의 성장·하락을 전망하는 주요 변수가 됐다. 가장 큰 타격을 받고 가치를 앞세운 EU가 앞으로 어떤 행보를 보일지 주목해 보자.
팟캐스트 ‘안쌤의 유로톡’ 제작·진행자, ‘셜록 홈즈 다시 읽기’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