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농업 연구ㆍ개발(R&D) 분야에서는 정부 주도로 새로운 품종을 개발하여 생산자들에게 보급하는 정책을 취해왔다. 그 임무를 수행해온 농촌진흥청은 1970년대에 생산성이 좋은 ‘통일벼’를 개발, 보급하여 쌀 자급을 달성했고, 그 이후 꾸준히 새로운 쌀 품종을 비롯해 마늘, 콩, 옥수수 등의 밭작물, 나아가 소, 돼지, 닭 등의 축산 분야에서도 신품종을 개발 보급해왔다. 그러나 2000년대에 들면서 신품종 개발의 성과 대비 보급의 성과는 예전과 같지 않다는 지적을 받기 시작했다. 정부 주도의 신품종 보급사업에 생산자들의 반응이 시큰둥해진 것이다.
농업 생산은 불확실성이 매우 높은 산업이다. 생물과 자연을 다루는 산업으로 일단 생산 활동이 시작되면 멈출 수가 없으며, 또 생산 사이클이 비교적 길다. 즉, 시장에서 수요의 크기에 변화가 있다고 해도 생산자로서는 공급량을 조절하기가 쉽지 않으며, 시장 수요에 맞지 않아 생산물을 제때 팔지 못하면 웃자라거나 상해 다 폐기해야 한다. 그러니 정부 R&D의 결과물인 신품종에 대해 확신이 없는 생산자들은 그 수용에 있어 보수적인 의사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다. 즉, 시장성이 담보된 신품종이 아니면 논문과 특허라는 ‘실험실의 결과물’로만 남는 시대가 됐다. 신품종의 시장성을 정부 측에서 판단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며, 정부만의 노력으로 신품종으로 시장을 창출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
정부가 주도해 온 과학기술혁신 정책은 2010년대에 들면서 대학, 산업, 정부가 동등한 위치에서 유기적으로 협력하며 혁신을 만들어 내는 트리플 헬릭스(Triple Helix: 삼중 나선) 모형에 기반한 정책으로 변화하고 있다. 농업 분야의 R&D도 변화 중이다. 예컨대 2012년에 시작된 ‘골든 시드 프로젝트(Golden Seed Project)’는 20여 가지 품목에서 경쟁력 있는 종자를 만들어 내는 10년간의 프로젝트였는데, 이전 품종 개발 R&D 사업과 사뭇 다른 목표와 성과 관리 체계를 갖췄다. 골든 시드 프로젝트에서는 새로운 종자 개발이라는 지식재산 창출 성과에 못지않게 이 종자를 활용한 사업화, 상품 개발 등 새로운 시장 창출에 초점을 맞췄다.
골든 시드 프로젝트 중 토종닭 품종 사업단에서는 축산 육종학 관련 대학 연구진 뿐만 아니라 식품 마케팅 관련 대학 연구진과 다양한 식품제조업체와 외식업체, 셰프들이 함께 참여해 사업단에서 새롭게 육종 고정한 ‘한협 토종닭’ 품종을 새로운 컨셉의 간편식과 식당의 신메뉴로 구현했다. 이를 통해 시장에서 새로운 수요를 만들어 내고 시장성을 검증한 다음 생산자들로 하여금 토종닭 품종의 보급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접근했다. 시간이 걸리는 접근이긴 했지만 생산자들로 하여금 팔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했다. 과제에 참여한 셰프들은 ‘한협 토종닭’은 구이를 했을 때 관능적 우수성이 부각된다는 것을 찾아냈고, 이에 따라 고급 레스토랑에 토종닭 스테이크가 신메뉴로 등장했다. 또, 토종닭 스테이크 밀키트 제품과 오븐이나 에어 프라이어에서 데워 먹을 수 있는 로스트(Roast) 토종닭 간편식 제품 등이 출시됐다. 과제는 종료됐지만 최근 토종닭을 발골 정육해 숯불에 구워 먹는 외식업체의 수가 서서히 늘고 있다. 이렇게 시장에서 수요가 커지면 생산자들은 자연스럽게 해당 품종을 수용하게 된다.
제주도 재래종 돼지를 활용해 생산성이 좋은 랜드레이스종과 교배하여 육종 고정한 토종돼지 품종인 ‘난축맛돈’은 2013년부터 제주도의 양돈농가에 보급을 시작했는데 2019년까지 사육규모가 1개 농가에 2000두 수준에 그쳤다. 그러나 2019년 난축맛돈의 육질을 개선하는 농촌진흥청의 노력과 함께 이를 상품화하는 마케팅 분야 연구진과 전문 유통업체, 셰프가 협업했다. 마블링이 많은 난축맛돈의 특성을 살린 부위육과 새로운 레시피를 활용한 식당을 오픈해 큰 인기를 끌자 여러 농장에서 생산에 참여하고자 하는 의사를 보이며 2년만에 난축맛돈의 개체수가 두배로 증가하고 농장 수도 네 개로 늘었다. 현재 난축맛돈에 대한 시장 수요는 더 빠르게 증가하고 있으며 수입 이베리코가 차지했던 국내 고급 돈육의 자리를 대체하고 있다.
최근 농촌진흥청에서는 우리 한우에 누렁이와 더불어 칡소와 흑우도 존재한다는 것을 시장에 알리고, 이 두 품종을 확산 보급하고자 하는 R&D 과제에 착수했다. 농촌진흥청 내부의 연구진뿐만 아니라 식육 가공 분야 대학 연구진, 마케팅 분야 대학 연구진, 식육 관련 전문 외식업체도 참여했다. 역시 접근은 시장에서의 수요를 만들어 내는 것에서 시작하고 있다. 대학, 산업, 정부가 동등한 위치에서 협업하며 한우 시장에서 새로운 수요를 만들어 내고, 생산자들이 칡소와 흑우 생산에 참여하는 생물 다양성이 확보되는 산업 생태계를 구축하는 과학기술혁신 정책을 농업 분야에서 만들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