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과 미국 등 주요 선진국들이 원자력 발전(원전)을 늘리고 있다. 2050년 탄소중립 실현을 위해서는 탄소 배출이 적은 원전 가동이 필수라는 판단에서다.
EU 집행위원회는 지난달 초 원전을 환경·기후 친화적인 지속가능한 녹색분류체계(Taxonomy·택소노미)로 분류하는 최종 법안을 의결했다. 원전을 탄소중립 실현을 위한 친환경 에너지원으로 규정한 것이다. 최종안은 향후 4개월간 EU 회원국과 유럽의회의 논의를 거쳐 27개 EU 회원국 중 20개국 이상 또는 유럽의회 과반(353명 이상)의 반대만 없으면 내년 1월 발효된다.
이렇게 되면 원전은 녹색산업으로 분류돼 재정적 또는 금융상의 혜택이 주어진다. 그만큼 원전에 대한 투자가 늘어 원전 설비가 확대될 수 있다는 의미다.
EU가 원전을 택소노미에 포함시킨 것은 2050년 탄소중립 실현을 위해 석탄발전을 제로화하고 신재생에너지로 전력 수요 대부분을 충당하기 어렵다는 현실을 반영한 결과다.
많은 전력을 생산하는 원전은 탄소 배출이 적은 에너지원으로 꼽힌다. 원전은 ㎾h당 5.1~6.4g의 이산화탄소를 배출해 신재생 에너지원인 집중태양열 및 풍력의 이산화탄소 배출(7.4g~83g)보다 적었다.
탄소 저배출과 함께 원전 산업 경쟁력 제고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따른 가스 공급 중단 우려 등으로 중요성이 커진 에너지 자립ㆍ안보 강화 등도 유럽 내 원전 필요성을 키웠다.
프랑스는 원전 확대에 앞장서고 있다.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최근 기자회견에서 “우리는 프랑스의 거대한 원자력 모험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며 "원자로 6기를 새로 짓고, 8기 추가 건설을 목표로 연구에 착수한다"고 밝혔다. 이를 통해 프랑스는 2050년까지 최대 14기의 신규 원전을 건설한다는 방침이다.
프랑스를 중심으로 슬로베니아·슬로바키아·핀란드·헝가리·체코·루마니아·불가리아·크로아티아 등도 친(親)원전 행보를 보이고 있고, 20년 넘게 원전 건설을 중단했던 영국도 최근 2050년까지 약 45조 원을 들여 소형모듈원전(SMR) 16기를 건설한다고 발표했다.
미국도 작년 12월 2050년 탄소중립을 위해 원전을 무공해 전원으로 규정하고 차세대 원자로 기술과 SMR 개발에 7년간 3조8000억 원을 투자하기로 했다. 중국 역시 작년 말 2035년까지 원전을 150기나 건설하겠다고 발표했다.
우리나라는 거꾸로 가고 있다. 정부는 2050년 탄소중립 실현을 위해 원전을 2025년부터 2029년까지 26기에서 18개로 줄이고, 2051년엔 7기로 감축한다는 방침이다. 대신 재생에너지 비율을 대폭 확대할 방침이다.
정부는 이를 반영해 올해 초 마련한 한국형 녹색분류체계인 K-택소노미에서 원전을 제외한 상태다. 우리나라가 주요 선진국과 비교해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이 저조하다는 판단에 띠른 것으로 보인다.
유럽과 미국, 일본의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은 2020년 기준 전체 발전의 20~38%에 달하는 반면 우리나라는 6~7%에 불과하다. 우리나라의 원전밀집도가 전 세계 1위인 상황에서 원전 건설 시 발생하는 사용후 핵연료 등 방사성 폐기물 처리가 쉽지 않다는 점도 원전 감축 배경이 되고 있다.
다만 정부의 원전 감축 정책이 변함없이 이행될지는 미지수다. 조만간 치러지는 대선이 분수령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