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부인(令夫人). 사전적 의미로 지체 높은 사람의 부인을 높여 이르는 말이다. 하지만 권위주의 절정기였던 1970년 전후 ‘영부인’이라는 호칭은 대통령 부인에게로 한정돼 쓰이기 시작했다. 물론 민주화 이후 영부인이라는 호칭은 공식적으로 사용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영부인 호칭이 또 다시 화두에 올랐다. 호칭 뿐 아니라 자격과 역할에 대해서도 말이 많은 상황이다. 이같은 논란의 불씨를 당긴 것은 허위 이력 의혹이 제기된 윤석열 후보 배우자 김건희 씨다.
26일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 부인 김건희 씨가 허위 경력 기재 의혹에 대해 사과했다. 김 씨는 이날 오후 서울 여의도 국민의힘 당사에서 열린 회견에서 “모든 것이 나의 잘못이고 불찰이다. 부디 용서해 달라”면서 “남편이 대통령이 되는 경우라도 아내의 역할에만 충실하겠다”고 말했다.
앞서 윤 후보도 인터뷰를 통해 ‘영부인’이라는 말을 쓰지 말자고 주장한 바 있다. 일부 매체는 해당 발언을 영부인제와 영부인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청와대 제2부속실을 폐지하자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했다.
과연 영부인제는 무엇일까, 이는 폐지될 수 있을까? 윤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김 씨는 외부 노출 없이 아내 역할에만 충실할 수 있을까?
결론적으로 영부인제는 폐지될 수 없다. 국내법상 영부인에 대한 법적 권한과 의무는 없기 때문이다. 법제상으로 대통령 배우자가 언급되는 경우는 대통령 등의 경호에 관한 법률 4조 경호 대상으로 ‘대통령과 그 가족’, ‘대통령 당선인과 그 가족’, ‘퇴임 후 10년 이내의 전직 대통령과 그 배우자’ 정의되는 경우가 거의 유일하다.
‘영부인’이라는 지위 자체도 공식적인 명칭이 아니다. 본래 사전적 의미로 ‘영부인’은 다른 사람의 부인을 3인칭으로 높여 부르는 말이다. 대통령 부인이라는 뜻으로는 의례적으로 써왔던 것일 뿐이다. 고로 영부인이라는 직함은 공식적으로는 없으며 관행적으로 이어져 온 셈이다.
해외에서도 대부분 마찬가지다. 대통령 총리는 국가수반 배우자에게 보호나 의전을 제공하기는 하나 법적 권한이나 의무는 없는 경우가 많다. 프랑스는 2017년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헌법상 대통령 배우자에 대한 공식적인 지위를 부여하고 별도 예산을 편성하려 했으나 거센 비판 여론에 이를 철회했다.
중국은 국가주석 배우자의 사회 활동을 자제하고 감추는 추세다. 이는 초대 주석 마오쩌둥의 부인 장칭이 문화대혁명을 주도하는 등 국정을 농단한 전적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다. 다만 시진핑 국가주석의 아내 펑리위안은 인기 가수 출신으로 공식 석상 노출과 대외활동을 늘려가고 있다.
대표적으로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부인 미셸 오바마는 교육, 빈곤, 여성·흑인 문제에 목소리를 내고 아동 비만과 학교 급식 개선 운동인 ‘렛츠 무브’ 캠페인 등을 펼치는 등 활발히 활동했다.
역대 한국 대통령 배우자도 법적 지위는 없으나 독자 활동을 펼친 경우가 많다.
문재인 대통령 부인 김정숙 여사는 독자적인 외교활동을 펼치는 등 대통령 배우자로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러나 법적 근거 없는 대통령 배우자의 공적 활동이 부적절하다는 지적도 있다. 최근 사망한 전두환 전 대통령 부인 이순자 여사는 재임 중 새세대심장재단을 만들어 활동했으나 퇴임 후 공금횡령 등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았고, 이명박 전 대통령 부인 김윤옥 여사는 한식 세계화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정부 부처를 동원하면서 비판받았다. 김정숙 여사 역시 지난 2018년 대통령 전용기를 이용해 인도를 방문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대외활동을 하지 않은 예도 있다. 지난 10월 별세한 노태우 전 대통령 부인 김옥숙 여사는 별도 활동을 하지 않았다. 전임 이순자 여사를 반면교사 삼아 자제했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다만, 김 씨도 대통령 공식일정이나 공식 석상에는 모습을 드러냈다.
김건희 씨의 최근 발언도 후보 배우자나 윤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될 시 대통령 부인으로서 별도의 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이양수 국민의힘 선대위 수석대변인은 김 씨 발언에 대해 “후보 배우자로서 공개 석상에 나타나야 하는 일들은 나름대로 수행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