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이 평전의 말미에 주목할 만한 대목이 있다. “대통령 주변에 있던 대부분은 ‘상황이 어렵기는 하나 타개할 수는 있다’는 낙관론을 이야기할 뿐 외환위기 가능성을 귀띔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저명인사 가운데 그 가능성을 경고한 사람은 포항제철 회장이던 자민련 총재 박태준이 유일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을 뿐이다.” 박태준은 30개로 급증한 종금사들이 단기외채 차입에 몰려든다는 사태를 전해 듣자 “백인 진주군 사령관이 서울에 오게 될 것”이라고 외환위기를 경고했다고 한다. 불행히도 이 경고는 김 대통령과 박 회장 간에 소통이 이뤄지지 않아 전달되지 않았다.(박 회장은 훗날 구약성경의 소돔과 고모라를 인용하며 ‘10명의 의인만 있었으면 망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당시 상황을 회고했다.)
요즘 세계 환경과 우리의 여건을 보면 몹시 아슬아슬하다. 경제는 물론 정치·외교·사회 문제까지 몇몇 대기업에 의지하는 ‘외다리 국가’가 된 느낌이다. 정부는 제4차 산업혁명과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 기후위기 등에 대처한다면서 재정을 크게 늘렸지만 정책의 메아리가 없다. 기능하지 않는 ‘큰 정부’로 빠져들고 있는 듯하다. 이런 상황을 위기라고 경고할 의인이 문재인 대통령 주변에 한 사람이라도 있을까.
한국과학기술한림원에 축적된 박태준 회장의 공적서는 지금도 전환기의 우리에게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비전과 전략, 실행할 정책들을 유효하게 제시한다.
“(박 회장은) 박정희 대통령이 이끄는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서 핵심 프로젝트였던 종합제철 건설을 1967년 11월부터 공식적으로 맡아 이후 1992년 10월 조강 연산 2100만톤 시대를 완성한 직후 포항제철 회장직에서 사임할 때까지 장장 25년에 걸쳐 한국 철강산업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키웠다. 이런 가운데 한국 산업화의 기반을 닦고 민주화의 물적 토대를 조성했다. 뿐만 아니라, 1986년 12월 국내 최초 이공계 연구 중심 대학 포스텍(포항공대)을 설립해 한국 대학교육의 새 지평을 열고 과학기술 발전의 새로운 요람을 구축했다.”
‘박태준 전기’를 쓴 이대환 작가는 이를 특히 ‘한국 과학기술의 발전’이란 시각에서 정리했다. 1968년 창업한 포항제철은 4무(無) 상태였다. 자본, 기술, 경험, 자원(원료)이 없었다. 이를 극복하려는 박 회장의 전략은 단기-중기-장기로 구분되었고, 모토는 ‘기술식민지에서 벗어나 일류국가 건설로 가는 길’이었다. 이에 따라 일본 기술을 공부하고 활용하고 극복하는 ‘지일(知日)-용일(用日)-극일(克日)’의 단계를 설정하고, 가장 먼저 기술연구소를 세웠으며, 수많은 직원을 제철 선진국으로 기술연수를 보냈다. 그 결과 1973년 7월 포항 1기 준공 당시에 순수한 포철의 손으로 종합제철을 가동하게 됐다. 1978년 12월 포항 3기 완공 후에는 일본기술단이 완전히 철수하게 되었으며, 광양제철소 건설을 시작할 때에는 스스로 기본기술계획을 작성해 일본 제철과 어깨를 겨루게 됐다.
포철은 1970년대 중반부터 종합제철 관리 공정의 합리화를 위해 전산화에 매진함으로써 국내 IT 기술 발전을 선도했다. 1994년에 완공한 포항방사광가속기 건설에 포철 자금을 투입하는 결단에도 한국 과학기술의 세계적 일류 수준 성장을 향한 염원이 담겨 있었다. 수학, 물리, 화학, 생명과학의 기초과학 분야에서 촉망받는 젊은 학자들의 연구를 조건 없이 지원해 주는 ‘청암과학펠로십’(현 포스코사이언스펠로십) 제도도 만들었다. 기초과학을 소홀히 하는 풍토를 바꾸겠다는 의지에서다.
13일은 고 박태준 회장의 10주기다. 이 어수선한 대선 정국에 그가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