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역대 거부들 대부분은 조정 중신이었거나 황제의 친척, 혹은 황제를 가장 가까운 지근거리에서 모셨던 환관 출신의 이른바 ‘관상(官商)’이었다. 이들은 권력과 재산 그리고 명예를 모두 한 손에 장악했던 상인이었으며 대부호, 거부였다.
이들 ‘관상’들은 황제 1인에게 끝없이 아부하는 한편, 조정 백관과 백성들 위에 군림하면서 거대한 재산을 축적했다. 대개 그들의 재산은 나라의 국고와 비견할 만하였다. 하지만 그 종말은 어김없이 모두 비극으로 끝났다.
나라의 관리가 되는 세 가지 길
등통(鄧通)은 촉군(蜀郡) 출신으로 서한(西漢) 시대 문제(文帝) 때 총신(寵臣)이다. 그는 딸만 셋 있는 집안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훗날 황제의 사랑을 받았다.
등통은 어릴 적부터 학문에는 재주가 별로 없고 오로지 강에 나가 배를 타고 낚시하고 새우 잡는 일에만 흥미가 많았다. 재산이 많던 부친은 그에게 관리가 될 기회를 주기 위하여 서울 장안으로 올려 보냈다.
당시 젊은이가 벼슬을 하는 길은 세 가지였다. 하나는 황제의 시종, 즉 낭관(郎官)이 되는 길로서 재산이 많은 가문의 자제 본인이 수레와 말을 마련하여 장안에 올라가 낭관 직을 담당하다가 국가가 필요로 할 경우에 정식 등용되는 방식이었다. 또 하나의 길은 장안이 아니라 지방에서 낮은 직위의 관리가 되는 방법으로서 재산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마지막 세 번째 길은 정부 기관에서 공식으로 초빙하는 방식으로서 이 경우에는 상당한 명성과 능력이 필요했다.
별다른 재주가 없었던 등통의 부친은 첫 번째 길을 택해 수레와 말을 딸려 장안으로 떠나보내며 아들에게 가문의 미래를 걸었다. 배를 잘 타는 재주를 지녔던 등통은 장안에서 용케도 황실의 선박을 관리하는 황두랑(黃頭郞)이란 벼슬을 얻었다.
뛰어난 황제 文帝의 한 가지 단점
한 문제는 본래 온화한 성격에 스스로 검약을 실천했던 것으로 유명한 제왕이었다. 그는 23년의 재위 기간 중 궁실의 정원과 거기(車騎) 그리고 의복을 늘리지 않았다. 언젠가는 그가 누대를 짓고자 생각해 담당 관리에게 비용을 계산하라고 명령하자 모두 백금(百金)이 필요하다고 답하였다. 이에 문제는 “백금이면 중인 열 가구의 재산에 해당한다”며 즉각 누대 짓는 계획을 중지하도록 하였다. 문제의 총애를 받던 신부인(愼夫人)도 의복이 땅이 끌리지 않았으며, 휘장에도 수를 놓지 않았다.
한 문제는 자기가 묻힐 능묘도 검소하게 만들 것을 명하여 절대 금이나 은, 또는 동으로 장식하지 말고 오직 소박한 기와만 쓰도록 하였다. 임종 직전에도 자신의 장례를 검소하게 지낼 것을 유언하였다.
그는 백성들의 조세를 크게 경감하고 요역도 경감시켰다. 밖으로 전쟁을 삼가고 안으로 생산을 장려하는 이른바 ‘휴양생식(休養生息)’의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나라의 경제는 수십 년 계속되었던 전쟁을 딛고 크게 번영하였다. 그의 치세는 아들 경제(景帝)의 시기를 합쳐서 ‘문경지치(文景之治)’라 칭해진다. 이 ‘문경지치’는 뒷날 한 무제 시기의 흉노 정벌을 가능하게 하는 등 한나라 전성기의 토대를 튼튼하게 구축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렇듯 뛰어난 문제(文帝)였지만, 한 가지 단점이 있다면 귀신을 믿고 불로장생과 승천(昇天)을 꿈꾼 황제였다는 점이었다. 어쨌든 황제의 이 유일한 단점으로 인하여 등통의 부귀영화는 만들어졌다.
하늘로 승천하는 꿈을 꾼 황제, ‘하늘로 승천한’ 사람
어느 날 문제가 승천하는 꿈을 꾸는데, 아무리 해도 하늘로 올라갈 수 없었다. 마음은 급한데 도무지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어떤 사람이 몸을 밀어주는 것이 아닌가! 문제는 비로소 하늘로 올라갈 수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황두랑이 짧은 적삼을 걸치고 있는데, 등 뒤에서 묶은 옷을 입고 있었다.
꿈에서 깬 황제는 꿈에서 본 사람을 찾기 위해 미앙궁 서쪽 연못 쪽으로 갔는데, 그곳에서 등 뒤로 옷을 묶은 등통을 보았다. 등통을 불러 그 이름을 물으니 ‘오를 등(登)’, ‘통할 통(通)’, 즉, “하늘로 오르다”는 뜻의 ‘등통(登通)’으로 들렸다. 기분이 너무 좋아진 문제는 곧바로 그를 자신의 옆에 항상 있게 하였다. 등통은 원래 온순하고 신중했으며 다른 사람과 잘 어울리는 성격이 아니었다. 황제가 그에게 여러 차례나 휴가를 줬지만 그는 도무지 외출하여 즐기는 법이 없었다. 그러자 황제는 그를 더욱 총애했으며, 그때마다 그에게 금은보화를 하사했다. 자연히 그는 일약 큰 부자가 되었다.
주전업 독점권 얻어 ‘등통전’ 만들어
하루는 허부(許負)라는 유명한 관상가를 궁궐로 불러 등통의 관상을 보라고 하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허부는 “등통의 운명은 굶어 죽는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깜짝 놀란 문제는 “등통을 부자로 만들 수 있는 운명이 나에게 있거늘, 어떻게 그가 굶어죽는다는 말이냐?”라면서 등통의 고향 촉군에 있는 크고 작은 구리 광산들을 등통에게 하사하였다. 그러면서 그에게 주전업(鑄錢業)에 대한 독점권까지 얹어 주었다.
등통이 구리 광산을 하사받고 주전을 하게 되었다는 소식에 고향 가족과 친척들 모두 환호하였다. 그들은 등통의 지휘하에 광산 경영과 주전에 모든 힘을 다하였다. 이렇게 하여 보기 좋고 품질도 탁월한 ‘등통전(鄧通錢)’이 만들어졌고, 위로는 왕공대신(王公大臣)과 대부호, 대상인부터 시장 노점상인까지 등통전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렇게 하여 등통은 순식간에 엄청난 부를 쌓을 수 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라에서 가장 큰 거부가 되었다. 승천하는 꿈은 황제가 꿨지만, 그야말로 ‘하늘로 승천한’ 사람은 바로 등통이었다.
景帝 즉위 후 모든 직위·재산 몰수…예언대로 거리에서 굶어죽다
한 문제에게는 심한 종기가 있었다. 황제의 총애에 감읍한 등통은 항상 그 종기를 입으로 빨아 고름을 빼냈다. 문제가 그런 등통에게 물었다. “이 세상에서 누가 나를 가장 사랑하겠느냐?” 그러자 등통은 “그야 물론 황태자이시죠”라고 대답하였다.
며칠 뒤 황태자가 문병을 왔을 때 자신의 종기를 입으로 빨아달라고 했다. 하지만 황태자는 입으로 빨면서도 그 낯빛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황태자는 며칠 뒤 등통이 항상 황제의 종기를 입으로 빨아준다는 말을 듣자 크게 부끄러워하면서도 동시에 등통을 몹시 미워하게 되었다.
몇 년 뒤 문제가 세상을 뜨고 태자가 즉위하였다. 바로 경제(景帝)였다. 경제는 자신이 저주했던 등통의 직위를 모조리 박탈하고 구리광산을 비롯한 모든 재산과 주전업에 대한 독점권도 몰수하였다.
등통은 나라에서 제일가는 재산을 지녔지만, 단 한 푼도 몸에 지니지 못한 채 궁궐에서 쫓겨나 하루아침에 거지가 되고 말았다. 등통은 전에 관상가가 예언한 대로 결국 거리에서 굶어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