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6일 독일 총선에서 제1정당이 된 사회민주당(사민당)의 총리 후보 올라프 숄츠(Olaf Scholz)가 쓴 선거 구호 중 하나이다. 남자인데 왜 구태여 ‘칸츨러린’, 여자 총리라는 단어를 썼을까? 바로 16년간 총리직을 수행 중인 앙겔라 메르켈처럼 뛰어난 총리가 될 수 있음을 강조하려 했기 때문이다.
중도우파인 집권 기독교민주당(기민당)·기독교사회당(기사당)이 막판에 조금 따라잡았지만 중도좌파 사민당이 1.6%포인트 차이로 이번 총선에서 최다 득표 정당이 되었다. 독일 유권자들은 지역구 출마자에 1표, 지지 정당에 1표를 각각 행사한다. 이와 같은 연동형 비례대표제 때문에 독일에서는 연립정부(연정)가 정치의 규칙이다. 보통 최다 득표 정당이 10% 내외의 지지를 얻은 소수 정당과 연정을 구성해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독일 역사상 처음으로 3당 연정이 구성될 듯하다. 양당제 중심의 정당제도가 파편화된 다당제 구조로 변했기 때문이다.
사회민주당은 세 번째, 네 번째 득표율을 올린 녹색당 및 자유민주당(자민당)과 7일부터 연정 구성 협상을 시작했다. 세 정당의 색이 신호등과 같아(사민당은 적색, 자민당은 노란색, 녹색당은 녹색) ‘신호등 연정’이라 불린다. 사민당과 녹색당은 기후변화 대처 등 정책 공통점이 많지만 두 정당 모두 친기업적인 자민당과는 간극이 크다. 따라서 연정 협상에서 정책 격차를 얼마나 메울 수 있을지 관심이 모아진다. 또 독일은 유럽통합을 주도해왔기에 독일의 정책은 곧 유럽과 국제정치경제에도 영향을 미친다.
사민당 ‘숄츠’ 인물 중심 선거로 승리
지난해 8월 사민당은 주요 정당 가운데 처음으로 당시 재무장관인 숄츠를 총리 후보로 선출했다. 당시 사민당의 정당 지지율은 15% 정도. 1863년 창당되어 세계 최고의 노동자 정당으로 자부심이 강한 정당에 이런 지지율은 치욕이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총리 후보로 선뜻 나선다는 것은 정치적 자살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숄츠는 1년이 조금 지나 정당 지지율을 10%포인트 이상 끌어올리며 제1 정당의 지위를 회복하는 데 일등공신이 됐다.
숄츠는 정치 경륜과 정책의 지속성, 개인적 호감도에서 다른 후보를 압도했다. 4월 중순 녹색당의 총리 후보로 임명된 아날레나 베어보크는 2~3주간 녹색당 지지율을 크게 끌어올렸으나 이후 지지율은 곤두박질쳤다. 이력서를 과장했고 보너스 소득 신고도 누락했다며 언론은 그를 집중 공격했다(5월 6일 자 ‘안병억의 유러피언 드림 8. 독일에서 녹색당 총리 나올까’ 참조).
아르민 라셰트는 메르켈의 뒤를 이어 기민당 당수가 됐고 총리 후보가 됐다. 그러나 그는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지사 이외에 정치 경험이 부족했다. 더욱이 그는 7월 중순 독일 여러 지역에 큰 홍수 피해가 났을 때 현장 방문에서 웃고 있는 모습이 카메라에 포착돼 곤욕을 치렀다. 독일 최대 주 바에에른의 지역정당 기사당(CSU)은 연방하원에서 기민당과 단일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한다. 원래 기사당의 당수 마르쿠스 죄더가 훨씬 더 인기가 있고 경륜이 있었지만 기민당이 총리 후보직을 양보하지 않았다. 숄츠 후보는 메르켈의 정책을 계승할 인물은 자신뿐이라며 일부 기민당·기사당 지지층까지 파고들었고 결국 이런 선거전이 효과를 발휘했다.
증세·감세, 기후위기 대응 정책 차이
독일에서는 최다 득표 정당에게 연립정부 구성 우선권이 없다. 이 때문에 총선에서 패배한 라셰트 기민당 당수는 최소 1주일 정도 자신도 자민당 및 녹색당과 연정을 구성할 수 있다며 버티었다. 그러나 기사당의 비판은 물론이고 기민당 안에서도 비판이 잇따르자 결국 3일 당수직 사임을 발표했고 기민당은 후임자 선출 절차에 들어갔다.
일단 ‘신호등’ 연정 구성에 참여하는 세 정당은 성탄절 이전에 협상을 마무리 짓고 이르면 연말, 아니면 내년 초 새 정부를 출범시키려 한다. 하지만 기후변화와 증세 여부에서 사민당·녹색당과 자민당과의 정책이 너무 차이가 크다.
기후변화의 경우 녹색당은 석탄발전을 2030년에 중단하고, 2030년부터 내연기관 자동차를 금지하려 한다. 기후변화에 대응하려 고속도로(아우토반)에서도 최고속도를 시속 130㎞로 법적으로 제한하려는 게 녹색당의 공식 정책이다. 자민당은 세계로 수출되는 수백만 대의 자동차를 제조하는 산업의 경쟁력을 약화하는 어떤 정책도 반대한다. 다만 석탄발전 폐기는 사민당과 자민당 모두 2038년으로 잡고 있어 녹색당과 협상해 중간 접점을 찾을 가능성이 높다.
더 큰 정책 간극은 증세 여부이다. 사민당과 녹색당 모두 부자 증세와 부동산 관련 세금의 증세를 지지한다. 특히 녹색당의 경우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투자를 균형재정 규정에서 예외를 적용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독일 기본법(헌법)은 연방정부의 재정 적자가 국내총생산(GDP) 대비 구조적인 적자의 경우 0.35%를 초과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해 사실상 균형재정을 명시했다. 유럽연합(EU) 최대 경제대국 독일이 이처럼 긴축정책을 우선하는 정책을 명시하고 실행해 왔기에 이는 EU 경제의 구조적인 불균형을 초래한다는 비판을 끊임없이 받아왔다. 독일이 앞장서서 대규로 인프라 투자를 하고 소비를 진작해야 하는데, 이 규정으로 독일은 적자가 채 0.35%에 이르기 전에 미리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기 때문이다.
EU 27개 회원국 가운데 19개 나라가 자국 화폐를 폐기하고 단일화폐 유로를 사용한다(19개 나라를 총칭해 유로존이라 부름). 유로존은 정부 재정적자와 공공부문의 부채를 각각 GDP의 3%와 60%로 규정한 안정성장협약 개정을 논의 중이다. 현재 이 규정은 팬데믹 때문에 내년 말까지 적용이 유예됐다. 독일과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등 ‘북’유럽 국가들은 기존 규정을 고수한다. 독일의 녹색당은 EU가 야심차게 제시한 2050년까지 탄소중립 대륙의 완성이라는 그린딜 달성을 위해서라도 이 규정을 탄력적으로 적용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탈리아와 그리스 등 ‘남’유럽 국가들은 이런 정책을 반긴다.
우리도 선거법 개정, 협치 이뤘으면…
앞으로 세 정당의 질긴 협상 과정이 남아 있다. 일부 전문가들은 녹색당과 자민당의 정책 차이가 너무 크기에 설령 합의에 이르더라도 최소 공배수가 될 것을 우려한다. 이번에 처음으로 투표권을 행사한 만 18세를 포함해 25세 이하의 유권자 가운데 25% 정도가 녹색당 혹은 자민당을 지지했다. 그만큼 젊은 유권자들은 양당제를 주도해왔던 사민당과 기민당·기사당에 크게 실망해 소수 정당에 더 많은 지지를 보냈다. 이들은 기존 정책의 변화를 요구했다.
3, 4위 정당이 연정 구성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독일의 선거제도가 연동형 비례대표제이기 때문이다. 연립정부이기 때문에 정당들은 질긴 협상을 통해 연정 합의문에 서명하고 정부를 구성하고, 나머지 4년간 합의문을 준수한다. 연정은 그야말로 참여 정당 간 상시 대화와 타협을 전제로 한다.
우리도 21대 총선을 독일식의 연동형 비례대표제로 선거법을 개정해 치렀더라면 국회 안에서 협치가 훨씬 더 진전됐을 것이다. 아쉽다.
팟캐스트 ‘안쌤의 유로톡’ 제작·진행자, ‘하룻밤에 읽는 영국사’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