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독립군 총사령관’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광복절인 15일 국내로 봉환된다. 1943년 카자흐스탄에서 소망하던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은지 78만년 만이다.
청와대 박경미 대변인은 12일 브리핑을 열고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 안장되어 있는 여천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모셔올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번 봉환은 카자흐스탄 카심-조마르트 토카예프 대통령의 방한과 연계돼 성사됐다. 토카예프 대통령은 문재인 대통령의 초청으로 8월 16~17일 양일간 우리나라를 국빈 방문한다.
문 대통령은 유해 봉환을 위해 14일 황기철 국가보훈처장을 특사로 하는 특사단을 카자흐스탄에 파견한다. 특사단에는 여천 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우원식 이사장과 국민대표 자격인 조진웅 배우가 참여한다. 박경미 대변인은 “15일 저녁 최고의 예우 속에 대한민국에 도착하는 홍범도 장군의 유해는 16일과 17일 양일간 국민 추모 기간을 거친 후, 18일 대전현충원에 안장될 예정”이라고 밝혔다.
‘날으는 홍범도가’라는 노래가 있을 정도로 홍범도 장군의 항일무장투쟁의 활약상은 대단했다.
1868년 머슴의 아들로 태어나 일찍 양친을 여윈 뒤 스스로도 머슴 생활을 했다. 직업군인과 스님, 사냥꾼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던 그는 명성황후가 일본군에 의해 시해됐다는 소식을 듣고 의병을 모집하며 항일운동의 길에 뛰어들었다.
강원도를 근거지 삼아 경기도와 평안도 등을 오가며 의병활동을 펼친 그는 뛰어난 사격술로 독립운동사의 전설이 됐다. 특히 천민으로 차별받던 포수들을 모아 처음 산포수 의병부대를 꾸렸고, 이들과 함께 봉오동전투·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끄는 주역이 됐다.
일본군들이 ‘하늘을 나는 장군’ (飛將軍)이라 부르며 두려워한 공포의 대상이었다. 일제가 ‘조선인들로부터 하느님과 같은 숭배를 받는 인물’로 보고할 정도였다. 평안도에서는 ‘축지법을 쓰는 장군’으로 통했다.
1923년 군복을 벗은 뒤 연해주 집단농장에서 일하던 그는 소련에 의해 1937년 11월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로 강제이주됐다. 이곳에서 홍 장구는 낮에는 정미소 노동자, 밤에는 고려극장 수위로 일하며 말년을 보냈다. 1941년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73살의 고령임에도 “일본의 동맹국 독일을 무찔러야 한다”며 현역으로 참전하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고령을 이유로 참전요청을 거부당하자 그는 25m 떨어진 작은 동전을 권총으로 명중시키며 녹슬지 않은 사격술을 과시하기도 했다. 광복을 목전에 둔 1943년 10월 25일 홍범도 장군은 75세를 일기로 머나먼 이국 땅에서 생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