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극단을 이끄는 문삼화 단장이 자신이 생각하는 연극의 방향성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1999년 연극판에 발을 들이고 2003년 데뷔작 연극 '사마귀'로 첫 입봉작부터 한국연극평론가협회 선정 '올해의 연극 베스트3'에 오른 그가 자신의 연극을 'B급'이라 말하는 게 다소 놀랍다. 하지만 그와 대화를 나누다보면 이보다 더 명확하게 그의 생각을 정리하는 말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최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에서 문 단장을 만났다. 그는 지난해 6월 김광보 국립극단장 후임으로 서울시극단장으로 취임했다. 공식적으론 김혜련 전 단장 이후 서울시극단을 이끄는 두 번째 여성 단장이지만, 공모로 뽑힌 여성 연출가는 그가 처음이다.
문 단장은 "큰 욕심 없이 지원했는데 덜컥 붙어서 얼떨떨한 상태로 시작했다"고 말하며 호탕하게 웃었다.
그는 지난 4월 연극 '정의의 사람들'을 선보였다. 단장 부임 이후 10개월 만에 처음 보인 작품이었다. 알베르 카뮈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이 작품은 1905년 러시아 대공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암살 사건을 다룬다. 극은 사건이 일어난 1905년과 카뮈가 글을 쓴 1949년, 그리고 2021년 광화문을 교차하며 진행된다.
"평이요? 극단적이에요. 별 1개, 5개, 1개, 5개였죠. '최악이다', '감사 받아야 한다'는 말까지도 나오던데요? 특히 대공비라는 인물에 대해 격이 떨어져서 설득이 안 된다는 평도 있었죠. 저는 동의하지 않아요. 남편의 시체가 폭탄에 맞아 갈가리 산산조각 났는데, 그걸 주워 담은 여자가 어떻게 제정신으로 돌아오나요? 대공비는 격이 있게 미쳐야 하나요?"
외국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고전으로 인식되는 작품을 가져오면서 쉽게 보여주고 싶었다는 그다. '웰메이드 연극'은 이미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광화문으로 '정의의 사람들'을 가져온 건 쉽게 풀어내자는 생각과 '종합선물세트' 같은 국립극단과 차별성을 두기 위한 시도가 혼합된 결과물이었다.
"2019년 명동예술극장에서 셰익스피어의 희극 '한여름 밤의 꿈'을 가져와 새롭게 연출했어요. 그때도 별 1개, 5개 1개 5개였죠. 어떤 사람은 '셰익스피어'를 저따위로 하냐며 매우 분노했어요. 그때 허미아가 쇼트커트였거든요. 그걸 보고도 지적하더라고요. 이해가 안 됐어요. 셰익스피어는 가발 쓰고 똥폼 잡아야만 하나요?"
그는 '정의의 사람들' 감상평 중 '나도 21세기의 칼리아예프가 되고 싶다'는 말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20살 때 '19 그리고 80'을 봤어요. 지금의 '해롤드와 모드'죠. 굉장히 보수적인 집안에서 자란 제가 자유로운 할머니 '모드'를 만난 거예요. 그 연극을 보고 나와서 하염없이 걸었어요. 버스도 안 탔죠. 찌릿찌릿 전기 작용을 받은 거예요. 그때 20살의 문삼화처럼 누군가 자기 인생에서 울림이나 자극을 받을 수 있는 작품을 보여주고 싶어요."
문 단장에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지친 이들을 위해 연극으로 어떤 위로를 주고 싶은지 물었다. 그의 첫 마디는 단호했다. "감히."
"예술이 대단히 위로해줄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예술이 인생보다, 생명보다 더 중요하고 크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인생에서 나온 게 예술이잖아요. 예술은 수많은 소중한 것 중 하나일 뿐, 절대적이지 않아요."
그에게 예술은 '절대가치'가 아니었다. 예술 혼자 가치를 가질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보면, 고도가 대단한 존재여서 못 가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의미를 부여해서 못 가는 것이라 생각해요. 예술도 마찬가지죠. 저희는 전쟁 중에도 임시 학교가 생겨서 교육이 이어갔듯 꾸준히 가려 합니다."
코로나19로 공연계는 어려움을 겪었다. 거리 두기 좌석제가 한 칸에서 두 칸으로 확대되면서 손익분기점을 넘기기 힘든 상황이 됐다. 이 과정 속에서 일부 제작사는 극을 올리기를 포기했고, 몇몇 극단은 파산했다. 이에 대한 방편으로 '공연 영상화 사업'이 나왔다. 문 단장은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새로운 장르의 발생"이라고 규정했다. 기술이 발전해도 연극은, 무대는 계속될 거라고도 했다.
"뉴욕현대미술관(MoMA)에 가면, 미술책에서 본 유명한 그림이 다 있어요. 심장이 빠르게 뛰었어요. 고흐의 붓터치까지 그대로 볼 수 있었죠. 화가가 느껴져요. 그의 호흡이 그대로 담긴 원화가 전세계를 돌며 전시를 하는 걸 보세요. 그런 오리지널리티의 감동이 연극에 있죠."
연극은 영화나 드라마 같은 다른 매체보다 대중성을 갖고 있지 않다. 고전의 이야기, 심오한 메시지라는 인식이 만연한 까닭이다. 연극만이 보여주는 분위기도 다소 무겁고 어렵다. 문 단장은 연극이 어려운 게 아니라 만드는 사람이 어렵게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어려우면 안 돼요. 자기 잘난 척이어도 안 되고 가르치려고 해선 안 되죠. 저도 '왜 연극이어야 하는가?' 고민합니다. 드라마 속 막장 이야기와는 다른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더라고요. 드라마, 영화와 차이를 둬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잖아요. 소파에서 편하게 볼 수 있는 걸 하루에 한 번 시간 맞춰서, 의자 불편한 소극장에 돈 내고 찾아오는 팬들에게 보여줄 순 없잖아요."
결국 살아남기 위한 방편이었다. 문 단장은 "연극을 보러 온 이들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본의 아니게 어렵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몇몇 연극인들이 '연극은 어려워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도 잘못된 것 아니라고 했다.
"연극엔 좋고 나쁘고 옳고 그런 건 없어요. 선택만 있을 뿐이죠. 맞고 틀리는 건 시험에만 있지 않나요?"
서울시극단은 국립극단과 함께 국내 대표적인 공공극단이다. 하지만 제작 예산은 연간 6억 원 안팎이다. 이는 국립극단의 약 10분의 1 수준이다. 문 단장은 노코멘트 하고 싶다면서도 아쉬움을 숨기지 못했다.
"턱없이 부족하죠. 국립극단이나 예술의전당과 비교하면 편당 예산이 1억 원 이상 차이가 나요. 출연료 차이도 최소 100만 원이고요. 세트나 의상을 줄이더라도 출연료를 더 주고 싶은데 속상합니다. 극단 '공상집단 뚱딴지'를 운영할 때 했던 '미안하다'는 말을 지금도 달고 사네요."
서울시극단장의 임기는 총 2년이다. 그가 느끼기에도 짧은 기간이다. 좋은 평가를 받고 싶은 마음이 크지만, '시극단의 색깔은 확실히 다르네'라는 말이 더욱 듣고 싶다고 했다. 국민의 4분의 1이 있는 서울시에서 '서울시다운' 작품을 보여주겠다는 마음이다.
"한 것도 없는데 벌써 1년이 지난 것 같아요. 극단 이끌어가는 것과 시극단의 업무는 차원이 다르네요. 제가 좋으나 싫으나 '공모'로선 최초의 여성 감독인데 제가 말아먹고 나가면 안 되잖아요."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