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코로나19 백신을 생산하는 모더나, 화이자, 얀센 등 글로벌 제약회사의 본사가 있는 곳이다. 덕분에 백신 확보 물량이 넘쳐난다. 외신들에 따르면 미국이 손에 쥔 백신은 4억5000만 명분에 달해 “남아돈다”는 표현이 나올 정도다. 부작용 문제가 부각된 아스트라제네카(AZ) 백신은 7일(현지시간) 백악관 수석 의학 고문이 “미국은 AZ 백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그는 “향후 기존 백신을 보강하기 위한 부스터샷(추가 접종)을 고려해도 확보 물량이 넉넉하다”고 말했다.
미국은 남아도는 백신을 그냥 썩힐 생각이 없어 보인다. 파우치 박사의 발언이 있기 이틀 전 바이든 행정부는 ‘백신외교’ 책임자를 임명했다. 5일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은 기자회견을 열고 게일 스미스 전 미국 국제개발처(USAID) 처장을 전 세계 백신 공급확대 업무를 담당하는 자리에 앉혔다. 물론 백신 확보에 어려움을 겪는 나라를 돕는다는 인도주의에 근거한 조치지만 외교가에서는 미리 백신 외교를 선점한 중국을 견제하려는 포석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중국은 이미 저개발국과 개발도상국 등을 중심으로 30여 개국에 중국산 백신을 제공하며 포섭에 나섰다. 물론 한국에도 손을 뻗은 상태다. 3일 있었던 정의용 외교부 장관과 왕이(王毅) 중국 외교 담당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의 회담이 끝난 뒤 중국은 한중 양국이 이른바 백신여권과 코로나19 백신에 대해 협력하기로 했다는 내용을 발표했다. 중국 외교부는 발표문에서 “양국은 건강코드 상호 인증을 위한 공조를 강화하고 백신 협력을 전개하며 신속통로(패스트트랙) 적용 범위를 확대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우리 측 발표문에는 이런 내용이 빠져 있었고, 외교부는 “실무협의가 필요한 사안”이라며 해명에 진땀을 흘려야 했다.
정부가 극심한 반발을 불러올 중국산 백신을 국내에 들여올 가능성은 크지 않을 테니 크게 걱정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중국의 러브콜을 문 대통령이 미국과의 ‘밀당’ 카드로 써먹을 기회가 생긴 것은 아닐까 싶어 반가운 생각이 든다.
미국과 중국이 글로벌 패권을 놓고 다투는 과정에서 한국의 역할에 관심이 많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니 두 나라의 백신 외교 경쟁을 잘 활용하면 국익에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문 대통령 혼자 힘으로는 버겁다면 도움을 요청해 볼 만한 정황들도 포착된다. 예컨대 삼성은 화이자와 남다른 친분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자녀가 화이자 가문의 손녀와 파티에서 함께 찍은 사진이 공개적으로 회자될 정도다. 친구끼리 전화 한 통쯤이야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손녀딸 부탁에 녹아내리지 않을 강철인간 할아버지가 있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게다가 미국은 삼성의 반도체 공장 설립을 강렬히 원하고 있으니 어쩌면 백신 후진국을 탈출하라며 신이 한국에 내려준 기회일지도 모른다.
한 가지 걱정은 문 대통령의 현실 인식이다. 문 대통령은 “백신 수급에 관해서는 자신 있게 말씀드린다”고 여러 번 강조했다. 문 대통령이 “걱정 말라” 하는 걸 보니 큰 걱정을 해야 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지난 연말 문 대통령은 모더나 최고경영자(CEO)와 직접 통화했다며 2분기에 2000만 명분의 모더나 백신이 들어온다고 대대적으로 알렸다. 하지만 4개월이 넘도록 구체적인 일정은 나오지 않고 있다.
문 대통령의 자신감과 현실이 거꾸로 가는 현상은 비단 백신뿐 아니다. 작년 이맘때 문 대통령이 “마스크는 충분하니 약국에 가서 확인해 보라” 하자 곧 마스크 대란이 났다. “코로나는 곧 종식될 것”이라 하자마자 대유행이 찾아왔다. “남북관계는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라더니 남북연락사무소가 폭파됐고, “부동산만큼은 자신 있다”고 호언하자 대폭등이 시작됐다.
문 대통령은 어쩌면 바이든 대통령을 상대로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나 종전선언을 설득할 걱정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는 미국에서 돌아오는 문 대통령이 빈손일까 걱정이다. wh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