秦에 멸망한 趙, 서남으로 강제 이주
촉 탁씨(蜀 卓氏)는 중국 역사상 최초의 철강대왕(鐵鋼大王)이다. 서한(西漢) 시대 초기에 들어서면서 염(鹽), 철(鐵), 주전(鑄錢)이라는 세 가지 업종이 국가경영에서 풀려나 민간에 개방됨에 따라 민간 상업자본의 가장 주요한 활동 방향 역시 이 세 가지 분야에 집중되었다.
염철업은 상공업이 결합되어 한편에서는 생산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판매함으로써 자본의 회전 변화와 축적 확대의 속도가 대단히 빨랐다. 또 야금업이나 소금판매업을 하는 자 중에서도 적지 않은 만금의 부자가 생겨났다. 당시 대야철상(大冶鐵商)으로 유명했던 인물이 바로 임공(臨邛)
지역의 탁씨이다.
촉군(蜀郡) 탁씨의 선조는 본래 조(趙)나라 사람이었다. 그는 평범한 농부였다. 그런데 진(秦)나라가 조나라를 멸망시켰고, 그때 탁씨도 강제로 이주되었다. 그는 이제 평범한 농부에서 망국(亡國)의 유민(流民)이 되었다.
앞을 내다보는 역발상의 안목
탁씨는 포로로 잡히고 약탈을 당한 유민의 신분으로 전락하여 부부 두 사람만이 직접 수레를 끌며 새 이주지로 옮겨갔다. 이 무렵 이주한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재물의 여유가 있으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앞을 다투어 인솔하는 진나라 관리에게 뇌물을 바치고 최대한 가까운 곳에 살기를 간청하면서 가맹(葭萌) 현에 거처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탁씨는 “이곳 토지는 협소하고 척박하다. 문산(汶山) 아래에는 드넓은 비옥한 전야(田野)가 있고 땅속에는 토란이 자라나 능히 양식으로 할 수 있어서 무슨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죽을 때까지 전혀 굶지 않는다고 들었다. 그곳의 주민들은 많은 사람들이 거리에서 일을 하고 있어 상업을 하기에 유리하다”고 말하면서 일부러 먼 곳으로 이주할 것을 요청하였다.
탁씨는 멀리 이주한 곳에서 땅을 대규모로 임대하여 토란 농사를 크게 지었다. 처음에는 판로 개척에 적지 않게 애를 먹었지만, 그는 많은 채소 장사들을 고용하였고 또 밭떼기 방식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인근의 토란 시장을 석권하게 되었다. 그의 명성도 높아졌다. 이렇게 토란으로 큰 성공을 거뒀지만, 그는 토란이 필경 계절에 구애되는 작물이기 때문에 이윤이 적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토란을 생산하지 않는 계절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다시 관리에게 부탁해 더 먼 곳으로 이주시켜 줄 것을 요청했다.
철광산 발견, 야금·주전 사업까지
이렇게 하여 결국 탁씨는 더 멀리 떨어진 변경 촉 땅 임공 지역에 배치되었는데, 그때에야 비로소 탁씨는 마음속으로 크게 기뻐하였다. 그는 그곳에 철광산이 있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곧 철이 생산되는 산골짜기에서 광물을 채굴하여 풀무질하고 주조하여 철기를 생산하였다. 그리고 인력과 재력을 기묘하게 운용하고 심혈을 기울여 경영하였다.
탁씨는 기회 포착과 가능성 그리고 사업 운영의 시각에서 멀리 임공으로의 이주를 희망하였던 것이었다. 서한 시대에 들어 야철업(冶鐵業)은 사영이 허용되었다. 철광을 발견한 탁씨는 광산이 있는 지역에서 주조를 하고 철기를 생산하였다. 당시 철기는 모든 사람들이 손에 넣고자 원하는 인기 상품이었다.
여기에 더해 탁씨는 뛰어난 경영 솜씨를 발휘함으로써 불과 몇 년 만에 전(滇)과 촉 지역의 백성들이 모두 그에게 고용되었고, 천여 명의 노비와 공인들이 광산과 작업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탁씨는 야금업(冶金業)만이 아니라 주전 사업도 하였다.
집안 전원…군주보다도 여유로운 삶
탁씨는 큰 부자가 되어 자신의 집 안 전원에서 낚시와 화훼를 즐겼다. 특히 그는 천하의 유명한 화초들을 수집하여 모두 자기 정원에 심어 온 집 안을 화려한 꽃밭으로 가꾸었다. 그의 집에서는 일 년 열두 달 언제나 은은하고 향기로운 꽃향기가 풍겨 나왔다.
손님을 초대하여 접대하기를 즐겼는데, 초대된 손님들 모두 떠날 때가 되면 너무 아쉬워했다. 또 각지에서 탁씨에게 부자가 될 수 있는 가르침을 청하는 사람들이 몰려들었지만, 그는 그들을 가벼이 여기지 않고 성실하게 자신의 경험을 전해 주었다. 이렇게 하여 그가 거주하는 곳은 어느덧 가장 번화한 상업 시장으로 발전하였다.
그의 이러한 삶은 능히 한 국가의 군주보다도 여유롭고 행복한 것이었다. 황제도 그를 높이 평가하여 입조를 권했지만, 그는 완곡하게 사양하였다. 일개 유민에서 나라에서 제일가는 거부(巨富)가 된 그는 이렇게 평생 여유롭고 한가로운 삶을 즐겼다.
천하의 구리와 철을 차지
탁씨가 이렇게 큰 부호로 될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보다도 보통 사람들의 상식과는 다른 장기적인 안목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안목은 그가 정보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던 데에서 가능했던 것이었다.
임공 지방은 구리와 철 자원이 풍부했는데, 탁씨만이 아니라 정정(程鄭) 역시 유명한 철상(鐵商)이었고 남월(南越)의 소수 민족들과 무역하였다. “정정은 본래 산동에서 이주 당한 포로로서 야금업을 하였고 멀리 서남이(西南夷)와 남월 지역의 이민족과 무역을 하였다. 그의 재산은 탁씨에 견줄 만하였는데, 탁씨와 정정은 모두 임공에 살았다.”(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화식열전(貨殖列傳)’)정정은 야철과 함께 구리 주조를 하여 당시 탁씨와 정정은 천하의 구리와 철을 모두 차지했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다.
훗날 서한의 저명한 문인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장인 탁왕손(卓王孫)은 바로 촉 탁씨의 후손이었다. 사서(史書)들은 한나라 문제(文帝) 시기에 커다란 실정(失政)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그것은 곧 촉군의 구리광산 수익권을 총신(寵臣)인 등통(鄧通)에게 하사한 사건을 가리킨다. 등통은 그 광산을 탁씨에게 세금을 납부한다는 조건으로 경영하게 하여 탁씨는 화폐 주조와 구리그릇을 만드는 영업권을 따냈다. 그리고 탁씨 탁왕손이 수만 금의 재산을 모으게 되었고 등통전(鄧通錢) 역시 천하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